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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와 사상]
유식학 확산의 주춧돌을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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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1 년 3 월 [통권 제95호]  /     /  작성일21-03-05 09:09  /   조회4,21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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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3 | 구양경무歐陽竟無

 

구양경무(歐陽竟無, 1871-1944, 사진 1)는 양문회의 제자로 스승의 필생의 사업이었던 금릉각경처에서 유식학 문헌 등 무수한 불교 경전 및 논서를 간행하고, 지나내학원을 설립하여 유식학 연구 및 보급, 교육에 힘썼던 인물이다. 이름은 점漸이고 중국 강서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정주 성리학에 경도하여 유학을 공부하였다가, 1894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관심이 바뀌어서 양명학으로 세상을 구제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사진 1. 구양경무. 

 

물론 양명학은 여전히 유학에 속하지만, 이 세상의 객관적인 리에 관심을 두는 성리학에 대하여 인간의 주관적인 마음을 중시하는 양명학으로 관심이 달라졌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눈과 방법론이 더욱 관념론적인 측면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더욱이 양명학과 불교의 사상적 거리는 원래 그다지 크지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계백화의 영향을 받아서 결국 불교를 궁극의 학문으로 생각하게 되고, 불서들을 섭렵하기 시작하였다. 1904년부터는 양문회를 사사하며 불교를 연구하였고, 그가 세상을 뜨고난 뒤에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금릉각경처를 운영하고 유식학을 연구하였다. 

 

유식학 문헌들의 간행과 지나내학원 설립

 

구양경무는 1918년 『유가사지론』 후반부 50권을 각경하여 발간하였고, 유식학 학설을 연구하고 법상유식의 개요를 정리하는 등 유식학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유가사지론』 상반부 50권은 스승인 양문회가 생전에 출간하였고, 그 뒤를 이어 구양경무가 후반부를 발간하여 완성하였다. 『유가사지론』은 유식학에서 매우 중요한 논저로서, 요가의 선전 수행을 17단계로 다룬 문헌이다. 중국 근대 유식학에 대한 유행과 연구에 이 책의 간행이 주는 영향은 매우 컸다. 또한 그는 1922년에 지나내학원을 창립하였는데, 여기에는 채원배, 장태염, 양계초, 여징, 왕은양, 탕영동 등 당대의 저명한 불교학자 및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주저인 『유식결택담』을 저술하고 강의하였다. 지나내학원에서는 연구부, 법상대학 특과, 외국어 및 불교의 각종 종파들을 공부하게 하였고, 특히 유식학에 중점을 두었다. 지나내학원이 중국 근대불교에 끼친 영향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예컨대 양계초는 “내학원에서 구양경무의 강의를 듣고서야 불교가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고백하였고, 웅십력 역시 내학원에서 유식학을 공부한 뒤에 자신의 주저인 『신유식론』을 쓸 수 있었다. 중국 근대불교가 유식학 중심으로 이루어진 데는 구양경무가 유식학 문헌들을 간행하고 지나내학원을 설립하였던 사실에 전적으로 빚졌다고 할 수 있다.    

 

1927년을 시작으로 구양경무는 『반야경』, 『열반경』 등의 경전을 더욱 깊이 연구하였고, 『장요藏要』를 편집하고 경론 50여 종을 인쇄하였다. 그들 경론들의 발간 서문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불교의 핵심을 서술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자 대성통곡하였고 저항 운동에 참여하였다. 1937년에는 문인들을 모아서 유학과 불교 두 학설을 회통하는 관점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유학과 불교의 회통 사상이 그의 말년 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후대에 내학원 동인인 천사천은 강진에 내학원 촉원을 세우고, 각경과 연구 사업을 계속하였다. 

 

학문적 방법론 

 

구양경무는 평생 불교 경전 약 천 여권을 간행함으로써 중국 근대불교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유학에서 불교로 전환한 이후에, 다시 불교로 유학을 통섭하는 것이었다. 『경무내외학』에 서술된 그의 학문적 방법론은 첫째, 범부의 사상을 기초로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등류무루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 둘째, 주관을 중심으로 해서는 안 되고 객관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것, 셋째, 세속의 견해를 주로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불가사의의 경지로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 넷째, 회의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해결을 위한 회의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유학과 불교의 통섭

 

구양경무는 유학의 경전인 『중용中庸』의 ‘성誠’과 불교의 ‘돈오頓悟’를 서로 대응하는 개념이라고 보았다. “돈오의 극치가 지성至誠이고, 그 본성을 다하고 물성을 다하면 천지가 참여하여 도가 이루어진다. 점수의 극치가 이루어지면 지극한 정성으로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중용』의 ‘중中’을 불교의 ‘적寂’에 대응하여 파악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송명 성리학의 여대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주자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다른 해석에 근거한 것이었다. 

 

구양경무는 유학의 핵심을 심학心學으로 보았다. 리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이 아니라 심을 중심으로 하는 양명학을 유학의 종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심학이 따로 전하지 않기 때문에 불교의 『반야경』을 연구하여 공자 사상의 한 단면과 연관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우주 만유는 ‘일심一心’에 의거한 것이고, 이 일심이 바로 ‘본심本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그 본체의 모습은 ‘고요함(寂)’이고, 그 공용의 모습은 ‘지혜롭다(智)’고 형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반야경』에서도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밝히는 것, 명심明心을 말하였고, 공자 역시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밝히는 것, 명심을 말하였다고 하였다. 공자가 고대의 소 음악을 듣고 감동을 받아서 “음식을 먹어도 단 맛을 몰랐고, 음악을 들어도 즐거운지를 몰랐다”고 한 에피스도를 구양경무는 불교적으로 해석하였다. 이는 모든 것들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였고, 바로 마음을 밝히는 명심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단지 양명학에서는 심학이 맹자에서 시작되었다고 본 데 대하여, 구양경무는 맹자는 과정이었을 뿐 심학은 실제로는 공자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구양경무는 반야지와 불성론을 본심 하나에 귀결하였다. 본심에서 그 인식의 장애를 제거하고 미혹함을 깨달음으로 바꾸는 것이 ‘지혜’, 즉 보리이고, 번뇌의 장애를 없애고 더러움을 깨끗함으로 바꾸는 것이 ‘고요함’, 즉 열반이라는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인간과 성인을 구분짓는 관건은 오직 ‘본심’에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본심은 고요함인데, 이를 유학에서는 항상 ‘인仁’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불교도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아가야 한다는 입세 정신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물론 근대적 특성과 연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그는 유학을 불교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켰던 것이다.      

    

 『대승기신론』 논쟁 

          

유식학이 당시 모든 지식인들의 관심을 끈 이유는 서양 문화에 대한 대응방식 때문이었다. 유식학은 교리가 논리적, 합리적이어서 서양 관념론 철학을 대치하거나 대응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서양 제국주의에 내몰려서 반식민지 내지는 식민지로 몰락할 위험에 처해 있던 중국이 칸트나 헤겔 못지않은 관념론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시 지식인들에게는 기적같은 일이었다. 전통불교와 달리 유식학에서는 불교를 서양철학과 대응할 수 있는 철학적 논리 체계에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  

 


사진 2. 구양경무저술집, 2014. 

 

더욱이 그동안 전해오지 않던 유식학 문헌들이 일본을 통해 전해지고, 그 문헌들이 금릉각경처를 통해 철저히 고증되고 교감된 상태로 간행되었다는 사실이 큰 역할을 하였다. 지나내학원에서 강의 연구를 하는 등 구양경무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기초를 놓았고, 당시 거의 모든 지식인들은 유식학에 열광하고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철학적 논리 체계에 비중을 둔 유식학을 연구한 지식인들은 중국 전통의 깨달음에 기반을 둔 종교성을 강조하는 전통불교적 시각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이래 유식학와 전통불교인 『대승기신론』 중에서 어느 것을 진정한 불교로 볼 것인가 하는 논쟁이 생겨나게 되었다.  

 

구양경무와 남경 지나내학원 학자들이 유식학의 입장에서 『대승기신론』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구양경무가 『유식결택담』을 지었던 것도 『대승기신론』의 진여와 무명의 관계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양경무와 내학원 학자들은 인도 유식불교의 입장에서 『대승기신론』이 인도 불교, 특히 유식학의 정신과 다르므로, 『대승기신론』이 대승불교의 참된 계승이 아니라 소승 불교, 또는 외도外道의 학설이라고 판정하였다. 

 

구양경무를 중심으로 한 내학원 학자들이 『대승기신론』을 비판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인도 불교의 본래 정신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식학의 이성적이고 사변적인 논리 정신으로 당시 서양 철학의 유입에 대응하려는 것이 의도였다고 여겨진다. 유식학은 본체와 현상, 진여와 현상, 법성과 법상을 구분하는 것이 해탈의 목표를 분명히 하게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봄과 동시에, 분석적, 과학적 방법을 택함으로써 신앙에 의한 구원을 저평가하게 되었다. 즉 유식학의 입장은 『대승기신론』에서 본체와 현상, 진여와 현상, 법성과 법상을 일치시켜 봄으로써 모든 중생의 불성을 확신하는 보편적인 구원을 주장하는 것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내용이다. 그리하여 구양경무는 법상과 법성을 구분하고 진여를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에게 진여는 생성 소멸되지 않는 절대적인 실체이고, 진여와 지혜는 서로 차원이 다른 영역에 속한다. 그는 진여의 절대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유식학의 유행은 중국 근대라는 당시의 지적 분위기와 연관된다. 서양 문화의 충격으로 전통 철학을 반성하게 되는 지성적인 분위기에서 지식인들은 지적인 이해가 없는 신앙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였고, 신앙을 강조하지 않는 따라서 완전히 대조적인 성격의 유식학에 끌렸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구양경무가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의 마음속에서 정주 성리학에서 양명학으로, 다시 불교, 그 중에서도 유식학으로 사상적 입장이 변화해갔던 과정, 그리고 양문회라는 한 스승을 만나 실천한 일들이 그 영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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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학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석·박사 졸업. 같은 대학 철학과에서 강의,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초빙교수를 지냈다. 지곡서당 한문연수과정 수료. 조계종 불학연구소 전문연구원 역임. 『웅십력 철학사상 연구』, 『신유식론』,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등 다수의 저서 및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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