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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록 읽는 일요일]
‘이해’의 두 가지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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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  2019 년 9 월 [통권 제7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31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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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 불교작가

 

‘이해理解’와 ‘이해利害’는 쌍둥이다. 독음이 같은데다가, 앞쪽의 ‘리’가 두음법칙으로 인해 음운이 ‘이’로 변한다는 사실까지 똑같다. 내가 알게 된 처음의 이해는 ‘이해理解’였다. 나중에 ‘이해利害’라는 단어도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됐다. 각각의 배움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 이뤄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어렴풋이, 理解에 대한 이해는 그저 공부만 하면 되던 시절의 지식이고 利害에 대한 이해는 ‘내 삶은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각성이 일어났던 때의 지식이라고 기억한다. 때 되면 시험을 보기만 하면 되는 나이에는 理解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수시로 시험에 ‘들어야’ 하는 나이가 되면 利害에도 밝아야 한다. 여하튼 이해에는 理解 말고도 利害라는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의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를 증오하면 그의 무엇이든 이해하지 않는다. 한편 누군가가 내게 해가 되지 않으면 그를 이해하지 않는다. 반면 누군가가 내게 손해를 끼치거나 위협이 되면, 그 속셈이 무엇이고 배경이 무엇인지 열심히 이해하려 애쓴다. 이렇듯 내 삶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으면 이해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내 삶에 크게 영향을 끼치면 무조건 이해해야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해’는 아무리 봐도 한자를 잘못 쓴 것 같다. 이해理解가 아니라 ‘이해利解’다. 내가 살아야 하니까 이해라는 것도 하는 것이다. 계속 이러다간 끝내 속 터져 죽을 것 같으니까, 공감이라는 것도 용서라는 것도 하는 것이다. 理解와 利害는 외모만 쌍둥이가 아니어서, 서로 몸을 섞어 ‘이익’이라는 자식을 낳는다.

 

이해理解는 이해利害의 하수인인가

 

남의 일에 관심이 없고 참견하기도 싫어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타인에게 민폐 끼치지 않는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삶을 보내자는 게 기본적인 인생계획이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들이 좋아해주지 않았고 그래서 돈이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남들이 좋아하는 것에 흥미를 가져야 했고 거기에 꾸준히 비위를 맞춰주니까 그나마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알다시피, 세상의 모든 시험이란 결국 남들이 만들어놓은 잣대에 나 자신을 우겨넣는 일이다. 물론 직업을 갖는다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건 거의 없다. 남들 속에서 나를 깎아내는 고행의 시작일 뿐이었다. 직장인의 근속이란 누구에게나 꿈과 자존심을 내어주고 실리를 취하는 과정이다. 윗사람에게 이해를 받아야만 신세가 편안하며, 끊임없이 이해해야만 마음이라도 편안할 수 있다. 理解는 利害의 하수인인가 보다.

 

평생 동안 남을 위해 울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 나이가 들수록 이것이 나의 결함으로 뼈저리게 다가온다. 돌아보면 모든 슬픔은 이기적이었다. 수학 성적이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없어서 울었었고, 실연당해서 울었었고, 마음의 병이 너무 막막해서 울었었고, 죽을병일 수도 있다는 진단에 두려워서 울었었다. 전부 다 내가 죽겠으니까 죽는다니까 흘렸던 눈물이고 게워냈던 통곡이다. 알고 보면 모조리 나 좀 알아달라고 제발 이해해달라고 벌였던 울음들이다. 부끄럽고 한심한 일인데, 사람도 아닌 죽음에게마저 동정을 구하며 구걸했던 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정말 슬펐던 적이, 단 한 푼의 이해관계 없이 슬펐던 적이 과연 있었을까. 눈시울 뜨거워지는 일조차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利解가 아니었던 理解를 찾기가 바다에서 민물 찾기다. 불교에 관한 책을 수시로 써대는 데도 무아無我에 대한 설명이 계속 서툴다고 느끼는 데에는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어떤 유생儒生이 조주趙州 선사를 찾아왔다. 그는 조주가 들고 있던 주장자拄杖子가 갖고 싶었다.
“스님, 부처님은 중생이 원하는 것은 뭐든 다 들어주신다면서요?”
“응.”
유생이 이틈을 파고들어 주장자를 달라고 졸랐다. 조주는 정색했다.
“군자君子는 자고로 남의 물건을 탐하지 않는다.”
“저는 군자가 아닌데요.”
“나도 부처가 아니다.”

 

주장자는 노스님들이 짚고 다니는 기다란 지팡이다. 연극이나 영화 따위에서 산신령들이 짚고 다니는 그 지팡이 맞다.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다니기도 한다. 주장자와 엇비슷한 길이인데, 육도를 떠도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여섯 개의 쇠고리를 끄트머리에 달았다. 주장자나 육환장이나 멋들어지긴 매한가지다. 보행을 돕는 도구이면서 큰스님으로서의 자부심을 돕는 도구다.

 

보시布施는 불교의 미덕이다. 내가 가진 것을 주면서 타인의 행복과 세상의 화합에 기여하라는 덕목이다.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인류의 신뢰를 지속적으로 받아온 종교라면 다들 권장하는 것이 보시다. 그래야만 부처가 되든 군자가 되든, 수준 높은 인간이 된다. 그런데 조주는 보시를 거부하고 있다. 부처가 아니어도 좋다면서, 큰스님으로 추켜세워지지 않더라도 좋다면서 말이다. 제아무리 윤리적인 행동도 알량한 자존심과 명예욕의 소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인가.
연예인은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산다. 대중에게 사랑받을 만한 외모나 가창력이나 연기력을 갖고 있어야만 연예인으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이 크고 뛰어나면 막대한 부를 벌어들일 수 있다. 유명하지 않으면 소득에 한계가 있는 법이다. 명성이란 것도 이해의 영역 안에 있다. 남들에게 이해받을 만한 행동이 많아야 명성이 쌓인다. 남들에게 이해받을 만한 행동이란 남들이 좋아하는 행동인데, 엄밀히 따지면 남들이 ‘자기들도 하고는 싶은데 좀처럼 따라하지 못하는 행동’이다. 연예인이든 운동선수든, 그들의 결핍을 살살 긁어주고 그들의 열등감을 발판으로 삼아서 스타로 군림하는 것이다. 동서양의 모든 종교적 계율에서 금욕禁慾과 소식小食을 강조하는 까닭도 이러한 맥락이다. 일반적인 수준의 사람들은 적게 먹는 것을 싫어하고 성적 유희를 포기하지 못한다. 종교인들은 도덕적 능력을 꾸준히 계발함으로써 그들보다 우위에 서고 나름의 권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세상은 온몸이 양파껍질 같아

 

이렇듯 이해받고 싶다는 욕구는 대표적인 자기애다. 인간은 타인들의 지지와 존경을 끌어 모아 세상의 중심에 서려 한다. 남의 마음을 훔치려는 사기꾼이든 나아가 나라를 훔치려는 정치인이든, 마음의 속셈은 거기서거기라고 생각한다. 슈퍼맨은 자기 자신만으로서 권력이 될 수 있지만, 현실에는 없는 인물이다. 유약하고 한계가 분명한 존재인 인간은 최대한 많은 타인들을 수하에 거느려야만 비로소 능력자가 될 수 있다. 남의 마음을 얻으려면 내 마음을 잘 숨기거나 그러듯하게 포장해야 한다. 끊임없이 지배하고 협박하고 관리해야 한다. 주기 싫은 데도 주어야 하고 갖고 싶은 데도 갖고 싶지 않은 척 해야 한다. 고금의 권력자들은 대부분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시켜서 죽인다. 그러므로 조주는 부처가 되기 전에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괜한 욕심으로 남에게 끌려 다니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진짜 부처는, 부처가 되지 않아도 좋다는 자이다. 스스로 족할 뿐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다.

 

이해받고 싶어서 기를 쓰고 이해하려 했다. 이용을 당해서라도 이해받고 싶었다. 이해받지 않아도 되는 자는 쓸데없이 이해하지 않았다. 상대가 나의 이권이거나 최소한 희망이어야만, 그를 이해하려고 했다. 인정한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려고 머리를 싸맨 까닭 역시 아마도 세상을 갖고 싶어서였고 부리고 싶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온몸이 양파껍질이어서 까도 까도 맵기만 했다. 어차피 매울 거, 단념하기로 한다. 그대가 무엇을 하고 어디까지 가든, 나는 나대로 행복했으면 한다. 나만이 나를 이해해도 그런 대로 살아갈 수 있다. 어차피 내가 사는 거 아닌가. 이해받기를 포기하는 삶이야말로 진정 자유로운 삶이고 진짜로 양심적인 삶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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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글
곰글 1975년생. 연세대 철학과 졸엄.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9권의 불서佛書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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