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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불교학의 성립과 전개]
근대 중국불교 부흥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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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  2021 년 2 월 [통권 제94호]  /     /  작성일21-02-05 11:39  /   조회4,29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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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2 | 양문회楊文會

 

근대중국의 불교학자들 가운데 양문회(楊文會, 1837-1911, 사진 1)를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중국불교 부흥의 아버지’라고 불리울 정도로 근대중국불교의 부흥에 큰 역할을 하였는데, “불교를 믿는 사람은 모두 양문회에게 귀의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당·송 시대에 전성기였던 중국 불교는 명·청대에 이르러 점차 쇠퇴하였다. 특히 청말의 태평천국의 난(1851-1864)으로 인하여 중국불교는 제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다. 

 


 

 

태평천국 교도들은 “불교 사찰, 도교 도관, 성황당, 사단 등 모든 종교 건물들을 불태웠고, 불상 등 각 상들을 파괴하였다”고 한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불교의 피해는 심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대 시기 양문회는 불교 부흥을 위해 평생 노력하였다. 당시 양문회가 없는 중국불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그가 한 역할은 첫째 불교 교육을 혁신하였던 것, 둘째 불교 경전과 논서를 유통시켰던 것, 그리고 불교 인재를 키워서 불교 연구 기풍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근대중국 불교의 부흥 및 혁신 운동은 양문회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1. 중년 시절의 양문회 모습. 


 

양문회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근대 중국불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두 개의 만남이 있다. 하나는 사랑하는 연인과의 결혼이 무산되어 죽고 싶은 마음에 서호 가를 산책하다 만난 『대승기신론』과의 만남, 그리고 영국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 있던 일본인 불교학자 난죠 분유와의 만남, 두 가지이다. 평생 지속된 이 두 만남을 통해 양문회는 근대적 불교학의 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금릉각경처 설립과 경전 간행

 

양문회는 사그라지던 불교의 불씨를 되살릴 불경의 간행을 위해서 1897년 남경에 금릉각경처(사진 2)를 설립하였다. 그는 특히 중국불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한 『대승기신론』 주소를 교감하고 정리하여 불교 연구의 근본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가 간행한 『기신론』 주소들을 보면, 우선 1885년 명나라 진계眞界가 편찬한 『기신론찬주起信論纂注』(2권)와 1890년 명나라 덕청德淸이 편찬한 『대승기신론직해大乘起信論直解』(2권), 1894년 명나라 지욱智旭이 편찬한 『대승기신론열망소大乘起信論裂網疏』가 있다. 이것은 그가 전인들의 『기신론』 사상에 대한 이해를 찾으려고 노력하였음을 의미하지만, 이 때는 명대明代 대덕들의 주해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1893년 난조 분유南條文雄를 통하여 일본에서 『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별기』를 얻은 뒤, 법장의 주해를 통하여 비로소 『기신론』 사상을 비교적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당唐의 실차난타가 한역漢譯한 『대승기신론』을 1898년 간행하였고, 다음 해에는 『대승기신론해동소大乘起信論海東疏』를 간행하여 『대승기신론소기회본大乘起信論疏記會本』(6권, 원효 찬)이라고 불렀다.

 


사진2. 1950년대의 금릉각경처 모습 

 

만년에는 수집한 각종 『기신론』의 주소들을 모아서 『대승기신론해회집大乘起信論解澮集』을 간행하였는데, 그 중에는 양梁나라 때 번역된 『기신론』(진제 역), 당唐나라 당시 번역된 『기신론』(실차난타 역), 『석마하연론』, 『기신론의기』·『별기』(법장 찬), 『대승기신론소기회본』(해동소), 『대승기신론찬기』(진계 찬), 『대승기신론직해』(덕청 찬), 『대승기신론열망소』(지욱 찬) 등 8가지가 다 포함되어 있다. 회집한 동기는 학자들에게 『기신론』 사상을 연구하는 체계적인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중에서 양문회는 법장의 주소를 최고로 생각하였는데, 그것은 『기신론』을 화엄종 등 중국 불교와 연관된 것으로 파악하고 긍정하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기신론』의 진여연기를 중국 불교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자 불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기신론』이 중관, 유식 사상과 돈교·원교인 중국 불교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음을 정확히 이해하였고, 중국불교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기신론』을 파악하였다. 이러한 이해를 위해 양문회는 우선 『기신론』의 다양한 주소들을 모아서 편찬, 발간하려는 기초 작업을 충실히 하였던 것이다. 금릉각경처는 그러한 목적에서 설립되었고, 아직까지 불경을 비롯한 각종 전통 서적들을 간행하고 있다.

 

기원정사 설립과 출가자 교육

 

양문회는 또한 금릉각경처 안에 기원정사를 세워서 수많은 청년들을 모아서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정사를 창립한 이유와 교육 방침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의 언어· 문자는 통하기 어렵다. 도를 밝히는 일은 나이가 많으면 언어를 배우기가 대단히 어렵고, 나이가 적은 자는 경문의 의미를 모르니 무익할 뿐이다. 그리하여 기원정사를 세워 인재를 기르는 바탕을 삼으려고 생각하였다. 세 가지 부문의 교수를 써서 첫째는 불교학, 둘째는 한문, 셋째는 영어를 가르치고자 하였다. 영어가 익숙해지면 인도학, 산스크리트어로 나아가게 하고, 다시 불교를 이 땅에 전하고자 하였다.”

 

양문회의 불교 교육 이념 중에는 영어를 가르치는 등 혁신적인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가 최초로 학문 연구에 뜻을 둔 동기도 불교도들의 무지와 부패를 목도하고 가슴 아파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교육 지침을 다음과 같이 제기하였다. “전국 승려 중에서 재산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학당을 개설하여 교내, 교외 두 반으로 나누게 한다. 외반은 보통의 학문을 위주로 하고, 불서를 겸하여 읽는다. 내반은 불교를 배우는 것을 근본으로 하되 보통의 학문을 겸하여 익힌다.” 바꾸어 말해 그가 혁신하려고 하였던 승려 교육은 불교와 세간 학문을 겸하여 가르쳐서 사회 변화의 필요에 부응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승려 교육 방법은 근대시기 새로운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려는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고, 한용운 등 근대 한국불교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양문회는 승려의 양성이나 주지의 선발에 대해서 체계적인 교육과 선택 후 임무를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 그 방법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1) 각 성省에서 명승 대찰을 선택하여 불교학당을 설립한다. 경비는 사찰 관람, 사원의 전답과 재산에서 제공한다. 

2) 강학 교사를 공개적으로 추천하되 3등급의 과정으로 상정한다. 

 ➀ 초급: 3년의 기간 동안 문학, 역사, 수학을 먼저 배우고, 다음에 초급 불교 이론을 배운다. 자격을 따면 사미계를 받는다. 

 ➁ 중급: 경, 율, 논을 조금 깊이있게 배우고, 3년이 지나면 자격을 따서 비구계를 받는다. 이 때 도첩을 준다. 

 ➂ 고급: 고급 불교의 교, 율, 선, 정의 전문적인 학문을 배운다. 3년이 되면 대의에 능통하고 경론을 유창하게 강론하는 자는 보살계를 받고, 도첩을 바꾼다. 

3) 9년 과정이 다 차면 삼운대계를 받고, 방장이 된다. 당堂에 올라 설법하고 강론하며 계를 전할 수 있어야 대화상大和尙이라고 칭한다. 한학 초·중급을 배워야 하고, 배우지 못하는 자는 환속하게 한다. 양문회가 이러한 불교교육에 활용한 경론들의 판본을 상세히 나열하고 있는 것을 보면, 종파와 관련 없이 전체 불교를 학습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양경무 등이 사업 계승·발전

 

양문회는 금릉각경처에 불학연구회와 기원정사를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하려고 시도하였고, 후대 불교도들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 이 사업은 이후 제자인 구양경무(歐陽竟無, 1871-1943)가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앞에서도 다루었지만 구양경무는 양문회 서거 후 그의 후계자로 진경청, 진의 등과 함께 금릉각경처를 인계받았던 인물이다. 1922년 지나내학원을 세우고 많은 불교 연구자들을 양성하였다. 구양경무는 “거사들의 규모가 방대하여 문하에 재사들이 많았다. 담사동은 화엄에 뛰어났고, 계백화桂伯華는 밀종에 뛰어났으며, 여단보黎端甫는 삼론三論에 능통하였다. 유식법상의 학문에서는 장태염, 손소후, 매힐운, 이정강, 붕양목, 구양경무 등이 뛰어났다.”고 당시 불교연구에 전념하였던 이들을 거론하였다. 태허(太虛, 1889-1947)는 “기원정사에 참여한 이들은 구양경무, 매광희, 석인산釋仁山, 지광智光 등 대다수가 현대 불교의 중요한 인물들이었고, 나 자신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고 말했다. 이들은 모두 청말 민국초기 중요한 불교학자들이고, 이 중에서도 태허와 구양경무는 당시 불교사상계를 이끌어간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근대 중국불교는 양문회의 불교교육과 사업 위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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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란
철학박사. 현재 고려대학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석·박사 졸업. 같은 대학 철학과에서 강의,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초빙교수를 지냈다. 지곡서당 한문연수과정 수료. 조계종 불학연구소 전문연구원 역임. 『웅십력 철학사상 연구』, 『신유식론』,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별기』 등 다수의 저서 및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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