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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건축 이야기]
독성각獨聖閣, 스스로 깨달은 수행자들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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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화  /  2021 년 2 월 [통권 제94호]  /     /  작성일21-02-05 10:07  /   조회5,14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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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각은 불교가 있는 나라 중에서도 유독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각이다. 그래서 독성각의 시작과 변화를 이해하면 한국불교의 특이점에 대한 접근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스승 없는 수행자

 

독성獨聖을 말 그대로 해석하면 혼자 성스러워진 존재 즉, 혼자 깨달은 수행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스승이 없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無師獨覺]. 그런데 정말 스승 없이 혼자 깨달았겠는가?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불교가 세상의 모든 존재나 현상을 스승이라고 본다면 모를까, 혼자 깨달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모순된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성이라는 의미는 당시 제도권 이외의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깨달음의 주체는 애초 보살이나 여래와 같은 존재라기보다는 ‘수행하며 깨달아가는 존재’일 것이다.

 

독성에 대한 논의는 심심치 않게 전개되었는데, 논의 초기에는 대개 16나한 중 첫 번째인 빈두루 존자라고 알고 있었으나, 연구가 진행되면서 혼자서 깨달은 모든 존재를 독성이라고 봐야한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이처럼 독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의견이 쉽게 모아지지 않는 것은 독성이 다른 나라에는 없는 캐릭터이며, 본격적으로 봉안되기 시작하던 조선후기에도 정체성이 정의되지 않아 지금까지 그 영향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 1. 천태산 국청사탑(중국의 창). 

 

그렇다면 독성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를 찾아 볼 필요가 있다. 「독성의문」에 의하면 그를 “천태산상독수성중天台山上獨修聖衆”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의문은 1634년에 간행된 『영산대회작법절차』에 수록된 글이다. 이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독성은 천태산(사진 1)에 있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천태산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천태지자天台智者(538-597)이다(사진 2).

 


사진2. 천태지자(Sina Buddhism). 

 

천태지자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간단히 언급하자면 불교를 체계화한 사람으로 평생 천태산에서 수행한 천태종의 종조라고 하면 부족하지만 틀린 설명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천태종은 의천(1055-1101)이 주도하여 선禪·교敎를 넘나들면서도 둘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법화경을 중심으로 천태교학을 널리 펼쳤다. 이처럼 천태지자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동아시아 불교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훌륭한 수행자로 인식된 것은 분명하다.

 


사진 3. 운문사 사리암 천태각 

 

특히 앞에서 언급한 「독성의문」의 내용이 ‘영산회靈山會’라 하여 법화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에 이르러 생겨난 독성이 곧 천태지자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사진 3·4·5·6).

 


사진 4. 운문사 사리암 천태각 독성상 

 


사진 5. 진관사 독성전. 



사진 6. 진관사 독성상.

 

독성각의 시작

 

이정도면 독성각과 천태각이 같은 건물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설명이 된 것 같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독성상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은 『금산사지』에 조각승 태전太顚이 칠성각에 독성상을 1615년에 조성하였다고 나오지만, 이 기록은 일제강점기 정리된 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릉 경국사에 독성각을 지었다는 기록도 『봉은사본말사지』에 전하고, 현존하는 독성도도 영주 안양원에 소장된 1812년 작품이 가장 이른 것으로 보아(사진 7) 17세기에 들어 점차 그림이나 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러 최고조를 이루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사진 7. 안양원 독성도 

 

17세기는 왜란과 호란 이후 대표적 호국신앙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는 나한신앙에 의지하기 위해 전국사찰에 명부전 못지않게 나한전이 많이 지어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나한신앙은 지금이야 시급하고 긴요한 필요가 있을 때 찾지만 고려시대 나한도량이 베풀어졌던 상황을 보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나 왕실이 선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8. 부석사 단하각. 

 

이처럼 호국신앙의 전통으로 선호되던 나한신앙은 왜란과 호란 이후 기층대중이 전면에 나서는 사회적 성장기에 들어 개인적 서원에 대해 신이한 능력으로 응답한다는 인식이 강해져서 지극히 개인적 신앙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진귀 조사, 석가를 가르친 선사?  

 

독성각이나 천태각을 통해 한국불교의 특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움이 좀 더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단하각丹霞閣이다. 단하라는 당호를 사용한 스님이 어디 당나라의 단하천연丹霞天然(739-824) 스님뿐이겠냐마는 단하각하면 아무래도 단하소불丹霞燒佛의 고사로 유명한 당나라의 단하천연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 스님은 파격적 수행관으로 유명하였고, 말년에는 단하산丹霞山에 들어가 수행한 선승이다. 

 


사진 9. 통도사 극락암 단하각. 

 

우리나라에서 단하각으로 유명한 사찰은 부석사와 통도사 극락암인데, 이 사찰들은 단하각에서 전형적인 나반 존자상을 봉안하고 독성기도를 하고 있다(사진 8·9). 그러나 남양주 흥국사와 서울 성북구 미타사에도 단하각은 있는데 이곳에는 산신이 모셔져 있다. 아마도 육당 최남선(1890-1957) 선생이 독성을 단군으로 인식했었고, 이 단군이 나중에 산신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맥이 닿아 있는 현상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처럼 단하각은 독성각이나 산신각으로 혼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생겼지만 점차 동류東流하여 중국에 와서는 중국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이중 선종은 가장 중국적인 정체성이 반영된 것으로 여기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한국 불교계의 주류를 형성한다. 현재 한국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이 바로 이 선종의 법통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6조 혜능 선사의 정상頂相[두골]사리가 쌍계사 금당에 봉안되어 있다고 하니 사실여부를 떠나 법통에 대한 인식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

 

법法의 계승은 스승과 제자 간의 1대1의 관계에서 전해지는 것이니 스승을 떠받드는 경향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인 것이다. 특히 이러한 사법嗣法의 전통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었기 때문에 스승의 존재는 더욱 절대화된다. 특히 선禪·교敎를 떠나 일가를 이룬 수행자에 대한 숭앙은 조사선 전통과 시너지를 일으키며 선사先師를 붓다 이상의 위치에 올려놓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우리나라에만 있는 부처님이 깨달은 후 진귀 조사에게 사사했다는 ‘진귀 조사설眞歸祖師說’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조사전 vs 독성각

 

성리학도 남송의 주희(1130-1200)가 체계화했지만 조선에서 더 성황을 이루었듯이 조사선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중국보다 강한 법통의식과 함께 조사전祖師殿과 같이 승가공동체를 위한 공간 말고도 신도를 위한 신앙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이 바로 독성각이다. 이처럼 당시 조선의 사상계는 불佛·유儒 모두 자존감만큼은 중국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10. 법천사지 탑전(문화재청). 

 

앞서 살펴본 대로 독성신앙은 나한신앙의 일부이며, 조사신앙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성각은 자력신앙을 선호하는 재가신도들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사전과 독성각의 차이는 이용자만이 아니라 위치에서도 나타난다. 선종 도입시기에 가까울수록 조사전의 입지는 ‘사찰 안쪽의 중요한 곳’에 승탑과 함께 건립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점차 흐려지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주불전의 주변이면서도 안마당에 면하는 곳이나 조계산 송광사의 사례와 같이 주불전 바로 뒤쪽에 연관성이 큰 건물들과 한데 몰려 별도의 영역을 구성하기도 한다. 즉, 이전보다는 좀 더 중심으로 다가온 것이라 볼 수 있는데, 분명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물론 부석사 조사당이나 불영사 원효전처럼 조사의 탑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시간도 한 참 지난 후에 세워진 건물들의 경우 신라 말 고려 초 승탑 옆에 있는 영당에 가까운지 아니면 조선시대 조사전에 더 가까운지 정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사진 10).

 

또한 독성각은 한 칸 이상의 규모로 짓지 않는다. 삼성각이란 이름으로 치성광 여래 및 산신과 한 집 살림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외 없이 한 칸 살이를 하는데, 그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을 ‘신과 나’의 관계 안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신도들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독성각, 재가 불자의 조사전

 

독성각은 누대에 걸려 쌓여 온 대승불교의 전통과 승가공동체의 운영결과가 교묘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생긴 건축이다. 주로 독성각이라고 불리지만 천태각이라 불리기도 하며, 최근 들어 생긴 것이 있지만 단하각이란 이름으로 지어지기도 한다. 또한 충분히 살펴봐야 하지만 의상과 원효와 같이 한국불교의 최고 스승이라 할 만한 조사들을 기념하는 건축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러한 경향은 계속 이어지고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독성각은 불교가 기층대중의 요구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자리 잡은 건축이면서도 이전부터 성행하던 나한신앙, 조사신앙 등과 같은 신앙적 특성이 조선후기에 성장한 새로운 수요층에 맞게 조정된 것으로 한국불교의 변화 과정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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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화
건축학 박사. 전 금강산 신계사 추진위원회 연구원, 전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전 조계종 전통사찰전수조사연구실 책임연구원, 현 동국대 강사 및 은평구 한옥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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