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 “도달한 그 곳이 곧 고향” > 월간고경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월간 고경홈 > 월간고경 연재기사

월간고경

[선시산책]
만해 한용운 - “도달한 그 곳이 곧 고향”


페이지 정보

백원기  /  2020 년 11 월 [통권 제91호]  /     /  작성일20-11-25 11:14  /   조회6,770회  /   댓글0건

본문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만해 한용운(1879-1944)은 3.1운동 때 민족대표의 한 분으로 『유심』을 발간하고,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불교대전』등의 저서를 남겼다.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인생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21세 무렵 만주 등 여러 지역을 방황하다 26세에 백담사로 들어가 연곡 스님에게 득도하고, 영제 스님에게서 봉완이라는 계명을 받았다.  

 

특히 연곡 스님의 도움으로 서양 근대사상을 소개한 양계초의 『음빙실문집』과 세계역사와 지리를 다룬 『영환지략』을 읽었던 것은 만해의 사상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조선 이외의 또 다른 넓은 천지가 있음을 인식하게 된 만해는 원산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 항구에 도착을 하게 되지만, 뜻하지 않게 친일 앞잡이 단체인 일진회 회원으로 오인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두만강을 건너 간신히 귀국하였다. 그 후 일본의 각지를 돌아다나며 견문을 넓히고,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직감하고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만해 한용운 진영

 

오랜 세월 산하를 떠도는 만해의 기행은 결국 존재의 깊어짐을 위한 수행의 과정이었다. 그러던 1917년 12월 3일 밤 오세암에서 좌선 중, 매서운 바람소리와 눈보라 속에서 자연과 자신의 일체, 우주 속의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지금까지 찾아 헤맨 고향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존재하는 세간으로서의 공간, 즉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자아에서 진정한 고향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 깨달음의 시가 다음의 「오도송」이다. 

     

    사나이 가는 곳마다 바로 고향인 것을 男兒到處是故鄕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그네 근심에 쌓였던가! 幾人長在客愁中!

    한 번 소리쳐 삼천세계를 깨뜨리니  一聲喝破三千界

    눈 속에 복사꽃이 점점이 흩날리네. 雪裡桃花片片紅.

                       

만해는 ‘삼천세계[우주]’의 거대한 힘의 유입을 느끼고, 그 순간 주객대립의 차별성을 극복하고 오도의 체험을 맞게 된다. 뜨거운 열정에 눈이 흐렸던 젊은 시절의 흔적이 바로 자신이 찾아 헤매던 고향이었다. 어둠에 가렸던 공간을 해체함으로써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만해 자신이 서 있는 이 땅이 바로 열반의 세계요, 일제하의 중생이 겪는 그 아픔자리가 바로 고향의 세계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었기에 그는 “한 번 소리쳐 삼천세계를 깨뜨리니 / 눈 속에 복사꽃이 점점이 흩날리네.”라는 사자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돈오의 사자후는 곧 자타불이의 직관적 세계를 말해 준다. 즉 바로 쏟아지는 눈 속에서 복사꽃을 본 것이다. 사실, 눈과 복사꽃은 동일한 공간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동일한 공간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함께 존재시킴으로써 묘유의 세계를 획득한다. ‘눈 속에 핀 복사꽃’, 그것은 곧 그의 깨달음의 상징이며 또한 시 정신의 핵심이 된다.

 

만해의 오도체험은 이후 그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전의 불교적 영역에서 민족적 영역으로 관심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리와 이타가 하나로 통합되는 인식, 즉 출출세간적 입장을 견지하는 대승불교의 자타불이의 보살행을 실천한 그의 적극적인 자세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보살행의 실천근간은  모든 차별과 분별을 넘어서는 깨달음이다. 하여 무한한 사랑을 내면화하여 인식한 만해가 두두물물의 아름다운 조응에 주목하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라 할 수 있다. 님과 나의 관계가 하나로 어우러진 합일의 내적 경지가 「나의 꿈」에서 역설적으로 잘 묘사되고 있다.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이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뚤귀뚤’ 울겠습니다. 

                                   

사랑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사랑의 첫발은 경이로움에 의한 지속적인 관심이다. 사랑하는 이의 주변을 맴돌며 떠나지 않는 것, 그것은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소망이다. 여기에서 그것은 인간과 자연이 일체감을 획득하는 정경을 통해 나타난다. 화자인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스럽게 님과 한몸이 된다. 새벽별, 바람, 귀뚜라미로 변하여 나는 님이 어떤 장소에 존재하든지 조용히 그곳에 함께하여 한 몸을 이룬다. 생명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생성이듯이, ‘님’ 또한 끊임없이 기다려지고 그리워하는 지향적 속성을 지닌 생성적 존재이다. 그러기에 화자는 시공을 초월하여 ‘님’과 함께 존재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연의 만물은 화해와 조화의 기반을 우주의 모든 존재가 상호연관성을 지니며, 한 몸임을 인식하는 대승大乘의 동체사상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이것은 곧 세계의 존재방식을 조화에 기초한 화엄의 세계로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자연관과 대승적 정신이 잘 조화를 이룬 시가 「낙원은 가시덤불에서」이다. 

          

   일경초一莖草가 장육금신丈六金身이 되고 

   장육금신이 일경초가 됩니다

   천지는 한 보금자리요 만유萬有는 같은 소조小鳥입니다 

   나는 자연의 거울에 인생을 비춰 보았습니다 

                               

만해는 하나의 풀에서 전 우주의 생명과 민족의식의 구원을 읽는다. 일경초가 장육금신이 되고 장육금신이 일경초가 된다는 말은, 연약한 한 줄기 풀은 결코 연약하지 않으며, 한 줄기 풀은 때로 바위틈에서도 살아나고, 한 줄기 풀이 장육금신 부처님의 몸이 되는 까닭임을 의미한다. 한 줄기 풀은 미미한 중생이지만 그 중생이 곧 부처님이기도 하다. 이러한 한 줄기 풀과 부처의 상호회통은 우주의 모든 생명은 상호연관 되어 있다는 화엄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천지는 한 보금자리이고 만유는 같은 소조”라는 것도 자연과 사물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인드라망의 존재임을 인식한 것이다. 천지간의 모든 존재는 성함과 쇠함, 삶과 죽음을 겪는 것이 한 마리 작은 새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삶도 다른 만유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기에 자연은 곧 인생의 거울이다. 거울 또한 단지 사물을 반영하는 기호가 아니라, 천지를 비추면서 본래 청정한 인간의 심성을 말한다. 이와 같이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들과 하나 되는 교감은 자연친화적 사유를 낳게 하고 자연의 생기를 통해 우주적 합일의 극치를 발견한다. 대표적인 시가 「고대苦待」이다. 

  

   다시 오는 별들은 고운 눈으로 반가운 표정을 빛내면서 

   머리를 조아 다투어 인사합니다. 

   풀 사이의 벌레들은 이상한 노래로 백주白晝의 모든 생명의

   전쟁을 쉬게 하는 평화의 밤을 공양供養합니다.  

                                         

자연물들의 아름다운 합일과 상호조응에 주목하고 있다.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과 지상의 풀벌레의 상호조응을 통해 하늘과 땅은 하나가 되고, 이들이 빚어내는 평화의 밤은 우주적 합일의 상태를 보여 준다. 평화의 밤은 만유의 모든 존재가 상호 침략과 전쟁을 멈추고 화해와 조화로움을 지향할 때만이 가능하다. 풀벌레가 부르는 생명의 노래는 화해와 조화를 기반으로 한 세계평화의 염원이다. 이 우주적 화음은 전쟁에 익숙한 인간을 천지화육天地化育에 동참하게 만들며 상호 유기적이며 통합적인 삶에 이르게 한다. 만해의 인류평화와 상호공존의 염원이 그대로 잘 드러나 있는 시편이다. 

 

아울러 만해의 시에서 생명사랑과 자비는 가장 포괄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적 의미를 지닌다. 그의 이러한 생명사랑은 일제 식민지시대라는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현실 세계 속에서 중생의 아픔과 끝까지 하고자 하는 자기 비움과 하심下心을 통해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시가 「나룻배와 행인」이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상징과 은유를 통해 인욕과 보시의 보살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애틋한 중생구제의 대승적 보살도 정신이 상징적인 배의 이미지로 잘 표현되고 있다. ‘나룻배’는 사바세계를 건너는 방편으로 존재한다. 사벌등안捨筏登岸이라 하여 차안에서 열반의 피안으로 가면 버려지고 말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해는 자기 존재를 ‘나룻배’로 한정하여 한없이 낮춘다. 비록 흙발에 짓밟힐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날마다 낡아가면서도 님을 기다리겠다는 화자의 기다림은 인욕과 보시의 실천적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배로 상징되는 삶의 자세는 자타불이의 동체적 관계로 세계를 인식한 결과이다. 여기에 만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중생구제의 세계 즉 출출세간의 시적 미학의 세계가 있다. 

 

한편, ‘심우尋牛’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선종의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로,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만해는 해방을 한해 앞 둔 1944년 서울의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심우장은 일제 강점기에 만해가 돌집[조선총독부]이 마주보이는 쪽으로 집을 지을 수 없다며 북향으로 지은 집이다. 하여 민족자존의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심우장은 만해가 비밀 항일 결사대 ‘만당’을 결성하고 총재가 되어 조선의 독립과 불교대중화를 통한 민족의 해방, 그리고 자성을 찾으려 한 삶의 회향처였다 할 수 있다. “조선의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인데 어떻게 불 땐 방에서 편히 살겠느냐?”며 심우장의 냉돌 위에서 꼿꼿하게 앉아 지냈다하여 만해에게는 ‘저울추’란 별명이 따라다니기도 했다. 이러한 암울한 시대를 지켜보면서 만해는 자신의 심정을 「심우장」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하다면

   차라리 찾지나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암울한 시대에 만해의 외로운 결기와 단단하고 매운 자아성찰을 보여 준다. 일체종지가 모두 자신 안에 있으므로 잃을 것이 없다. 그러나 밖에서 소를 찾는다고 법석을 떠니 우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여의 세계는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닫고 보면 모든 것이 다 부처의 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또 다시 방황하지 말고 마음의 결의를 굳건히 지키겠다는 만해의 결연한 다짐으로 읽혀진다. 그러한 사실은 일제말기 많은 민족지도자들과 지성인들이 일제의 회유에 변절했지만 공약삼장의 하나처럼 최후의 일각까지 꼿꼿한 지조를 지키며 불굴의 정신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다 간 그의 올곧은 삶에서 반증된다. 바로 여기에 그의 위대한 민족자존의 정신이 있다할 것이다.

 

조화와 화해의 추구는 만해가 선시를 통해 시재를 탁마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자연을 통한 선적 수행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그의 선시는 자아를 버리고 자연물과 하나 되어 내적 일체감을 획득한다. 모든 경계를 허물고 내가 우주가 되고 우주가 내가 되는 경지를 지향하는 면모는 눈 오는 밤에 달과 매화, 오동나무와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 자연의 일부가 되는 모습을 한 폭의 산수화로 묘사한 「청한淸寒」에서 잘 드러난다.  

 

   달을 기다리는 매화는 학인 양 서있고 待月梅何鶴

   오동나무에 기댄 사람은 봉황인 듯도 하구나. 依梧人亦鳳

   밤 새워 눈보라는 그치질 않았는데, 通宵寒不盡 

   초라한 지붕에는 눈이 내려 봉우리를 이뤘구나! 陋屋雪爲峰

                                

자연의 내적 질서를 자연스럽게 내면화 한 만해의 역사인식의 일면을 보여주는 시편이다.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가 달을 기다리며 학처럼 야윈다고 그려냄으로써 자연과 자연이 서로 조응하는 정경을 읽어 낼 수 있다. 인간은 자연의 겸손한 일원으로 동참함으로써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에 내재된 대우주 질서에 편입된다.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비움으로써 도달하는 자연과 하나 되는 이른바 여백의 미와 함께 인간 중심적 사유에 대한 전면적 반성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만해는 이와 같은 자연과의 교감과 조화를 바탕으로 마음을 맑히고 정신 수양을 깊게 해 나간다. 요컨대 많은 민족지도자들과 지성인들이 일제의 회유에 변절했지만 만해는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눈 속에 핀 복사꽃의 정신으로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의지를 시적 상상력과 비전으로 보여 주었다. 여기에는 온갖 차별에 대한 저항의지와 약자에 대한 자비심으로 올곧게 살아가고자 했던 만해의 생명사랑이 해방된 미래를 꿈꾸는 중요한 추동력으로 작용했다 할 수 있다.

 

 


저작권자(©) 월간 고경.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백원기
전 국제포교사회 회장. 전 한국동서비교문학회 부회장, 저서로 <선시의이해와 마음치유>, <불교 설화와 마음치유>, ><숲 명상시의 이해와 마음치유> 등 다수가 있다.
백원기님의 모든글 보기

많이 본 뉴스

추천 0 비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로그인 하시면 추천과 댓글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 03150 서울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파빌리온 1232호

발행인 겸 편집인 : 벽해원택발행처: 성철사상연구원

편집자문위원 : 원해, 원행, 원영, 원소, 원천, 원당 스님 편집 : 성철사상연구원

편집부 : 02-2198-5100, 영업부 : 02-2198-5375FAX : 050-5116-5374

이메일 : whitelotus100@daum.net

Copyright © 2020 월간고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