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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의 세계]
힐링 붓다, 약사여래의 수인手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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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자  /  2019 년 9 월 [통권 제77호]  /     /  작성일20-06-26 16:13  /   조회56,68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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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자 | 동국대 겸임교수 · 미술사 

 

약사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병을 치유하는 것과 관련된 현세이익적인 불교신앙이라는 점에 있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고를 치유하기 위해 손에 약그릇[약기藥器]을 들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사진1).

 

 

사진1. 청양 장곡사 약사여래상, 고려(1346년)

 

 

약사여래는 어두움을 비추어주기 때문에 ‘약사유리광여래’라고 하며 병에 따라 약을 주고 모든 병고를 없애주기 때문에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약사여래는 과거에 약왕藥王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없애기 위한 12가지의 큰 소원[12大願]을 세웠다.

 

약사여래의 12대원은 약사여래가 단지 중생의 병고만을 구제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의복이나 음식 등 의식주 문제는 물론 나쁜 가르침이나 외도外道에 빠진 사람, 계율을 파괴한 사람, 법을 어긴 사람 등의 구제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 12대원 외에도 극락왕생을 원하는 사람, 악귀를 물리쳐서 뜻하지 않는 죽음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 온갖 재앙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사람들이 약사여래를 부르면 구제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근본 고통인 생로병사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고통은 병으로 인한 고통이다. 이러한 인간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질병 문제를 불교에서는 약사신앙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약사여래의 기원과 함께 약사신앙은 내세관과 관련되는데 그것은 현실의 병에 대한 치유뿐만 아니라, 그 원인을 역병과 재난을 일으키는 나쁜 생각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근본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바로 ‘약’이며 아픔을 해소시켜주는 가장 보편적인 도구로서 작용한다.

약사신앙은 현대처럼 과학과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 사회에는 질병과 기근에 고통을 당하던 백성들에게 보다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고 신앙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통일신라에 이르러서는 질병 치료의 문제와 결부되어 약사신앙이 특히 성행하게 되었다.

 

약사신앙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밀본법사가 <약사경>을 외워 선덕여왕(?-647, 재위 632-647)의 병을 고쳤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덕여왕 치병 관계 기사는 선덕여왕이 아프자 흥륜사의 법척 스님이 고치지 못하는 것을 밀본 법사가 약사경을 외워 고쳤다는 것이다. 밀본 스님의 선덕여왕 치병 사례는 약사신앙을 왕실에서 수용하게 된 계기가 된 것으로 선덕여왕 때 약사신앙이 신라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2.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오른손으로 삼계인을 한 약사여래상 

 


사진 3. 발우형 약그릇과 지팡이을 든 약사여래상  

 

약그릇[藥器]을 든 약사여래

 

약사여래의 도상적 특징은 어디에 기원을 둔 것일까? 인도승 불공(705-774)이 번역한 <약사여래염송의궤>에 의하면 약사여래는 왼손에는 약그릇[藥器]이나 어떤 것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가주無價珠를 지물로 가지며, 오른손으로는 삼계인三界印을 짓는다고 한다. 또한 대좌 아래에는 12신장상을 배치하고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 협시로 둔다는 것이다. 불공스님이 <약사여래염송의궤>를 번역할 당시에는 약 그릇을 든 약사여래가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사진2). <약사여래염송의궤>에 기록된 삼계인은 약사여래가 중생들이 삼계의 미혹함에서 벗어나 약사유리정토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상징한 것으로 설법인을 짓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약발藥鉢과 석장錫杖을 든 약사여래상

 

일본에서 작성된 <도상초圖像抄> 권2 「약사여래」조와 <별존잡기別尊雜記> 권4 「약사」조에는 약이 든 발우 형태의 약발藥鉢과 수행자의 지물인 지팡이[錫杖]를 지물로 한 약사여래상이 기록되어 있다(사진3). 석장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상이 처음 등장한 것은 초당시기에 개착된 돈황막고굴 322굴 동벽 문 남쪽의 약사삼존상에서부터이다. 이후 석장을 든 약사여래상은 돈황 지역에서 새로운 도상으로 정착되었는데, 우리나라와 일본의 약사여래상에서는 드문 형식이다(사진4). 

 


사진3. 발우형 약기와 석장을 든 약사여래상, 돈황 6굴 북벽, 오대(907-979)  


사진5. 시무외여원인을 짓고 있는 약사여래상

 

 

약그릇을 들고 있지 않는 약사여래상

 

<각선초覺禪抄> 권2 「약사법藥師法」에 의하면 석가여래와 약사여래는 동체이면서 이름만 다를 뿐이라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두 불상은 형상이 모두 같다는 것이다. 또한 오른손은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짓고 왼손은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여원인與願印을 맺으며, 손에는 약기가 없다는 것이다. 약사여래상 가운데 약기藥器가 없는 상이 존재하는 것은 여기에 기원한다고 할 수 있다(사진5). 

 


 

사진 6. 오른손에 보주를 든 약사여래상. 신라, 국립중앙박물관

 

병마를 항복시키는 모습을 한 약사여래상

 

우리나라의 약사신앙은 삼국시대 때 도입된 이후 조선시대까지 성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은 병으로 인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경전에 언급된 약사여래상의 특징과는 달리 삼국시대 약사여래상은 몸의 중심을 한쪽 다리에 두고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한 채 한쪽 손에 보주를 들고 있는 것이다(사진6).

 

 

사진7 .  항마촉지인을 짓고 약기를 든 약사여래상, 통일신라, 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 약사여래상과 삼국시대 약사여래상의 가장 큰 차이는 수인에서 찾을 수 있다. 통일신라의 약사여래상은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왼손에는 약그릇을 올려놓은 독특한 수인을 하고 있다. 이러한 수인을 한 이유로 석가여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 수인이 석굴암 본존상에 수용된 이래 아미타여래상이나 약사여래상에도 수용되었다는 설과, 석가여래가 마왕으로부터 항복을 얻은 깨달음의 순간을 상징하는 것처럼 병마를 항복시켜야 하는 약사여래에게도 신라인들이 적용시킨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항마촉지인이 변형된 독특한 약사여래상의 수인은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에 근거한다. 즉 약사여래의 이름만 들어도 모든 병환이 치유되고, 어리석음이 격파되며, 번뇌가 없어지는 까닭에 한 손은 마군이나 병마를 격파하고, 한 손에는 약을 가지고 병환을 치유하는 것을 가장 큰 바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짓고, 왼손에는 약기를 올려놓은 약기인藥器印을 짓는 것이 약사여래의 수인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사진7). 

 

 

둥근 보주寶珠를 든 약사여래상

 

우리나라에 유행한 약사신앙의 형태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시대는 통일신라시대이다. 약사신앙 신라에 도입된 것은 선덕여왕 때 밀본법사가 <약사경>을 독송하여, 선덕여왕의 병을 치료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어 약사신앙이 성행했던 것은 통일신라 때 조성된 많은 약사여래상을 통해 알 수 있다. 

 

단독의 상 뿐만 아니라 경주 남산 보리사 석불처럼 석가여래좌상 광배 뒷면에 표현되기도 하고 불탑과 경주 남산 칠불암처럼 사방불로 표현된 경우도 있다. 이 가운데 경덕왕(재위 742-765)이 백률사에 행차할 때 땅 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리는 곳을 파 보았더니 사방불이 새겨진 돌이 발견되어 창건했다는 경주 굴불사 터의 동방 유리광정토의 약사여래상은 둥근 보주를 들고 있는데(사진8), 보주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불공 스님이 번역한 <약사여래염송의궤>에 의하면 왼손에는 약그릇[약기藥器]이나 어떤 것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가주無價珠를 지물로 가진다고 했다. 둥근 보주를 약사여래가 약그릇 대신 지물로 들고 있는 것은 의궤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대품반야경>에 의하면 보주는 구슬[주珠]의 총칭으로 사람의 질병을 치유해 주고 궁핍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어떠한 독도 침투하지 못하게 하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성질을 갖는 보주는 현세에서 복을 구하는 신앙의 성격이 강한 약사여래상의 지물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사진8 . 보주를 든 굴불사지 동면 약사여래상,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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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자
「간다라 불전도상佛傳圖像의 연 구」로 문학박사학위 취득,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불교미술전공 초빙교수, 강원도 문화재전문위원. 저서에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 기록 연구』, 공동 저서로 『치유하는 붓다』·『간다라에서 만난 부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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