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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추모 기사]
큰스님 모시고 산 반백년 세월, 그 날이 하루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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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스님  /  1998 년 9 월 [통권 제11호]  /     /  작성일20-05-27 00:44  /   조회11,69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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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아시(如是我侍)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스님을 처음 뵌 시절로 되돌아가니 지난 반백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 감회가 무량하기만 합니다. 6․25전란으로 병을 얻어 끝내 세상을 떠나신 부친의 천도재를 올리기 위해 찾아간 곳이 천제굴, 스님께서는 부처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으로 토굴 이름을 천제굴(闡提窟)이라고 이름하시고, 악신(惡神)도 천도시킨다는 도인스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때였습니다.

 

 


 

 

재를 마친 후 스님의 자상하신 말씀은 저의 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고 말았습니다. 육신의 부친을 떠나보내고 마음의 부친을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고, 전쟁의 인연을 그대로 이은 것으로 믿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첫 10년은 수행 행자로서 스님을 시봉하였고, 다음 10년은 팔공산 성전암에 은거 주석하시던 시절을 모셨고, 다음 10년은 가야산 해인총림 방장으로 계시던 때 방장실장으로, 다음 10년은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하시어 열반하실 때까지 종정사서실장으로, 가까이에서 시봉하고 지켜보고 온 인연을 갖게 되었으니, 저로서는 남다른 감회를 갖습니다.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차별 없이, 찾아오는 신도들은 모두 부엌에서 직접 밥을 지어 불전에 공양 올리게 하시던 스님의 엄한 모습과,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평범하게 대하시던 스님의 고고한 모습이 그때에도 멋있어 보여 철없이 흉내를 내다가 종아리를 맞은 일들이 새삼스럽게 기억납니다.

선망부모의 천도를 원하는 신도들에게는 먼저 돌아가신 영가를 위해 기원하라고 하시면서 참회예배를 시키던 일이며, 불공은 자신이 직접 해야지 스님들께 부탁해서는 공덕이 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삼천번 절을 하게 하시던 스님의 모습은 그 후 열반하시던 날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온 것입니다.

 

봉암사 결사가 전란으로 중도에 그친 일을 못내 아쉬워하시면서 천제굴에서라도 총림의 일과를 지켜야 한다고 능엄주와 예불대참회를 고집하셨으며, 손수 범어를 우리말로 음역하고 불공의 예식을 청규대로 고수하신 스님의 한국 불교 중흥을 위한 집념은 그때에도 이후에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생신상을 준비해 온 공양구를 담 너머로 쏟아버리시고, 출가한 수행자는 육신의 생일이 의미가 없다 하시고 평생 생신을 세지 않으신 스님의 모습 또한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되었을 때도, 정화란 안으로부터 내실을 기하면서 이루어져야지, 패를 늘려 사찰 차지하는 싸움으로 비약하면 불교의 위상만 추락시킨다고 하신 말씀이 “새 도둑 묵은 도둑” 이야기로 와전되어 일부의 저항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정화운동에 앞장서자는 청담스님의 권고를 정중히 사양하시고 스님은 스님대로 하실 일이 따로 있다고 하시면서 일선에 나서지 않으셨으며, 해인사 주지 임명장도 자운스님께 미루시고 스님은 팔공산으로 자리를 옮겨 뒷날을 기약하는 지혜를 보이셨습니다.

천제굴에서 인연을 가진 스님으로는 서옹스님, 우봉스님, 경환스님, 혜암, 도우, 법전, 일조스님과 주야로 스님의 건강을 걱정해 주시던 인홍스님, 혜춘, 장일, 원묵, 묘전스님 등 비구니 스님들이 계십니다, 모두 고마운 스님들이십니다.

 

은거수범(隱居垂範)

 

불교정화불사 때 양쪽 대표자가 차례로 찾아와 해인사에 가기를 간청했지만 아직은 시절인연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한송스님의 초청을 받아들여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으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그 배후에는 일우스님의 공로가 있었기에 훗날 전계사로 모시는 일에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성전암에서는 암자 둘레에 철조망을 두르고 설, 추석, 결제, 해제를 전후하여 기도정진 날짜를 정하시고 그 날 이외에는 신도들의 출입은 물론 스님들의 출입 또한 금하셨습니다. 백련암에는 그 기도정진 날짜가 오늘에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정부의 가야산 관광개발 정책에 맞서 해인사의 격을 보여주는 석비

 

 

문을 여는 날에도 부산이나 서울에서 오는 분들에 한해서 출입을 허락하셨으며, 가까운 대구에서 오는 분이나 큰절에 적은 둔 분들은 일체 출입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근처 신도를 멀리한 것이 성전암에서 10년을 주석하게 된 방편이었다는 것을 훨씬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성전암에 은거하시면서 불교의 교리를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간접 번역인 한문 경전보다는 범어 원전의 직역을 강조하시어 당시 학교에 있는 불교학 교수들보다도 앞선 경전관(經典觀)을 보이셨으며, 서경수, 고익진 교수들이 스님의 말씀을 많이 따랐습니다.

 

바다 건너 서구의 학술자료들을 얻어 보기가 어려웠던 당시, 불교의 교리나 윤회설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있으면 사람을 보내서라도 구해 와서 참조하셨으며, 그로 인해 영혼존재의 설명이나 불교의 물리학적인 논리, 최면술의 잠재의식 표현과 전생역행의 시험 등, 시대에 앞서가는 이론을 정립하셨으며, 불교가 늙은 종교로 치부되던 당시의 사회개념을 고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러한 자료의 정보를 얻기 위해 한국관련 정치면에 구멍이 난 ‘타임’지를 구독하셨고, 당시 화보 월간지의 대표지였던 ‘라이프’지도 구독하셨으며, 저에게도 외국어 연수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불교관련 서적이나 역사관련 사료를 수집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셨으며, 대법륜 보살님이 많은 지원을 하셨습니다.

 

 

회향식 전날 사리탑 현장의 모습. 좌우에 큰스님의 평소 가르침을 새기고 정성스럽게 꽂꽂이를 해 놓았다. 그 날 저녁 5시부터 밤 12시까지 400여 명의 신도들이 3천배를 했다.

 

 

한번은 <남전대장경>이 하역 도중 인부들의 실수로 전질이 수장된 일이 있었지만, 스님은 다시 주문하여 결국 그 경전을 소장하셨고, 당시 스님들 중에는 가장 많은 불전 자료를 갖고 계시는 스님으로 알려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뒷날 해인총림 시절에 설법의 기조(基調)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오늘의 한국불교 교리를 재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박성배 교수를 비롯한 불교대학생연합회 회원 다수가 스님의 법문에 발심하여 출가했던 일이나, 덕산거사의 스님에 대한 존경은 스님의 불교중흥신념을 높이 산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해인총림(海印叢林)

 

팔공산의 만 10년 칩거를 거쳐 운달산 김룡사 1년 여의 주석을 마치고 해인사에 가신 것이 30넌 전의 일이었습니다. 자운스님이 백련암을 비워 두고 스님을 모시고 오라는 말씀을 하셨으므로 감사를 드리면서 해인사로 옮기셨습니다.

자운스님은 열반하시기 직전까지도 스님의 일에 하나같이 심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종정 재추대를 결정하는 원로회에는 보행이 어려우신데도 시자의 부축을 받고 참석하여 은사스님의 종정 재선출을 결정하는 일을 힘을 보태주셨습니다. 자운 큰스님께서 의리를 지키시고 불교를 아끼신 고결한 자비행에 다시금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면서 오늘 우리들의 모자라는 점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은사스님께서는 상좌가 되려는 스님들을 모두 다른 스님에게 보내고 저에게도 다른 스님의 상좌가 되라고 하셨으나 저는 계속 행자로 있겠다고 고집하였습니다. 행자 생활이 만 10년이 되던 날, 은사스님은 자운 율사스님께 계를 받게 하셨고, 율사스님은 그 해 다른 수계를 갖지 않으셔서 저에게는 깊은 감명을 갖게 하셨습니다.

 

67년도 해인사에서 열린 종회에서 총림법이 통과되고 해인총림 초대방장에 은사스님이 추대되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본분종사로서의 법좌를 개설하셨습니다. 해인총림을 출범하게 된 데는 청담스님, 자운스님, 경산스님, 영암스님 등 당시 종단 원로스님의 노고가 크셨으며, 스님의 불교중흥의 큰 뜻을 마음껏 펼치도록 스님께 주지 임명권까지 전 권한을 부여하는 파격적인 제도로 출발하였습니다.

 

조계종정(曹溪宗正)

 

스님은 주어진 권리는 모두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부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에 몸소 실천을 보이셨습니다. 상좌들에게 주지는 고사하고 삼직도 맡지 말도록 하셨고, 오직 해인총림 발전에 노고를 다하셨으며, 가야산 성역을 수호주지(守護住持)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사찰의 주권을 수호하고 기본재산을 지키는 일에는 지혜를 보이셨으며, 정부가 가야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광개발을 시도할 때에는 해인성지(海人聖地)로 남을 것을 강조하셨으니, 해인사 동구 앞 ‘해인성지’ 석비가 지금도 그날의 주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수도장이 관광객들의 놀이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고 불전수입을 보전하시려고 영산회를 조직하여 모금을 하시고는 큰 법당에도 관람객의 출입을 막으려 하신 스님, 그 철저한 불교개혁 정신이 잊혀질까 두렵습니다.

 

‘백일법문’으로 알려진 스님의 교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한국불교의 교리체계를 정립하셨고, ‘선림고경총서’에 담겨진 선지는 선종의 지침이 되었으며, 법상의 상당법어는 바로 부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종정으로 추대되시고는 성수, 진경, 녹원, 의현 등 총무원장스님에게 기본재산과 주권을 지키는 행정을 지시하시고는 가야산을 떠나지 않으셨으며, 태산 보다 무거운 거취는 불교의 위상에 높이를 더하였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에는 늘 이기시고 남과의 경쟁에서는 항상 지기만 하신 스님, 스님의 마음속에는 일찍이 높은 자리가 없었습니다.

 

한국불교 조계종의 큰스님들이 모두 은사스님과는 깊은 인연이 있으며 해인총림 운영에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 중 총림 초기에 고행하신 스님들을 생각해 보면, 열반하신 지월, 도광, 현경스님을 비롯하여, 혜암, 성수, 법전, 일타, 봉주, 도성, 보성, 지관, 송월, 정원, 동진, 고봉, 명진, 보광, 도선, 중천, 종성스님 등 많은 스님들이 계십니다. 물심으로 도와주신 영산회 회원, 정신회 회원, 호법계 회원 불자님들 또한 고마운 분들이었습니다.

 

인류의 정신사에 큰 자취를 남기신 스님, 사리탑이 회향되어 큰 획을 긋는 이 시점에서 그 크신 업적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함께 인연한 보람으로 지난 일들을 회향해 본 것입니다.

이 불사에 동참해 주신 여러 불자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면서 이 사리탑이 미래겁이 다하도록 이 자리를 지키면서 찾아오는 불자들에게 마음의 등불이 되어지기를 기원드립니다.

회상을 끝내면서 스님 법어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伽倻山色 千古秀, 紅流洞天 萬世明”

 

무인년 가을, 사리탑 회향에 즈음하여

천제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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