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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 산책]
파모개두 지해종도(把茅蓋頭 知解宗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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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탁  /  1998 년 3 월 [통권 제9호]  /     /  작성일20-05-06 08:36  /   조회8,77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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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년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월운스님께 가서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를 배울 수 있었다. 전에 배우긴 했었지만 스님도 뵈올 겸 다시 갔다. 스님께서는 전통 화엄 강사이신데, 교판(敎判)과 행상(行相) 부분에서 남다른 안목을 갖고 추심은 물론 선․교를 망라하는 엄청난 독서가이시다. 뿐만 아니라 읽으신 것을 명상을 통해 반추하시고 실천으로 검증하시기 때문에, 같은 책을 같이 읽어도 깊이가 다르다. 나는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도서』강의에서도 그것이 여실히 드러났었다.

 

 


 

 

하루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육조혜능이 하택신회를 평가하여 한 말 중에 ‘파모개두 지해종도(把茅蓋頭 知解宗徒)’를 말씀하셨다. 물론 이 말은 『도서』에 나오는 것은 아니고, 하택종을 설명하시다가 나온 말씀이다. 이 말의 출전은 『오등회원』(제2권) 하택스님조이다.

 

육조혜능 선사가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것은 머리도 꼬리도 없고, 이름도 자(字)도 없고, 앞도 뒤도 없다. 여러분들은 이게 무엇인지 알겠는가?”
그러자 하택신회 선사가 나아가 대답했다.
“그것은 모든 현상[法]의 본래 근원이며 저의 불성입니다.”
그러자 육조혜능 선사께서는 나무랐다.
“금방 그대에게 이름도 자도 없다고 했는데, 그대는 그것을 본원이니 불성이니 하는구나.”
하택신회는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다. 

 

혜능선사가 말하기를, “차자향후몰유파모개두 야지성득개지해종도(此子向後沒有把茅蓋頭, 也只成得箇知解宗徒)”라 했다. 우리말로 번역하며, “그대는 뒷날 수행도량의 최고 어른인 방장 노릇도 못하고, 그저 한낱 알음알이나 내는 무리가 될 것이다.”이다 ‘파모개두(把茅蓋頭)’를 ‘하나의 가(家)를 이루어 거기에 주지 노릇하다’로 풀으셨다.

 

2.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 말을 잘못 번역한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에 발표한 글에서 그랬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시에 내가 보았던 것은 ‘파모개두’와 비슷한 말인 ‘편와개두(片瓦蓋頭)’였다. 어떻게 잘못 번역했는가 하면 이렇다. 지붕의 기와가 깨져도 고치지 못하는 가난함을 비유한 것으로 읽었다. 글자의 뜻만 언 듯 보면 깨진 기왓장으로 머리를 덮는다가 되니까 말이다. ‘파모개두’의 번역도 마찬가지이다. 한 줌의 띠 풀로 머리를 덮는다는 뜻으로 보아 궁색한 생활을 비유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어느 글에서 이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 일마저도 잊어먹고 유야무야 몇 달이 지났다. 그러다가 금년 4월에 그간 기고했던 잡지나 신문의 글을 모다 『선사들이 가려는 세상』(장경각)이란 제목으로 책을 엮었다. 이 과정에서 원고를 교정하다가 잘못된 곳을 찾게 되었다.

 

1994년 2월호 『월간해인』 원고에서 실수를 한 것이다. 2월호는 『벽암록』을 주제로 이야기를 했다. 그 책의 29칙에 보면 대수법진 스님을 설명하는 속에 ‘소지인(掃地人)’이란 말이 있는데, 그 뜻을 몰라 이리저리 찾는 과정에서 ‘편와개도’가 들어 있는 문장을 발견했다. 그것을 그대로 적어보면 이렇다. “니이후유편와개두 멱개소지인야무(你以後有片瓦蓋頭, 覓箇掃地人也無).” 이 문장을 당시에 나는 “그대(대수법진) 이후로 (나위산은) 깨진 기와 조각으로 머리를 가리더라도 (너처럼) 일체를 싹 쓸어버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로 읽었다. 그러니까 ‘편와개두’를 아주 가난함을 나타내는 4자성어로 읽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편와개두’는 어느 절의 주지 또는 방장을 지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잘못 번역했다는 것은 기억이 나는데 어떡하는 게 제대로 된 번역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월운스님께서 작년에 『도서』강의하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 봉선사로 전화를 드렸다.
그 결과로 바로 잡은 것이 위에서 말한 대로이다. 부처님이 오래 사시기를 바라던 수학 제자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다음 주부터는 찾아뵙고 다시 글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지난 달부터는 『화엄경수소연초』를 강의 하셨는데 이런저런 일로 참석하지 못했다.

 

3.

글자 하나하나를 엄밀하고 고증하는 목적은 그 문장이 전하려는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함에 있다. 그러면 ‘파모개두’를 둘러싼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인가? 우선 하택신회 선사의 경우를 보자. 여기에서는 하택신회를 비판하는 것이 중요 내용이다. 하택신회가 ‘지해종도’로 낙인찍힌 일은 적어도 선종을 표방하는 한국의 불교계에서는 다 알려진 일이다. 지중종도란 이른바 ‘알음알이’로 진리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알음알이’란 말은 사전에는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불교 내부에서만 쓰는 방언인 듯하다. 언어나 문자를 매개로 불교를 논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임에는 분명하다. 이 말은 ‘언어도단’과 ‘불립문자’를 표방하는 경우에 사용되는 단골 용어이다.

 

그러면 선종에서는 왜 언어나 문자를 이토록 거부하는가? 불교에서는 선불교도 물론, 깨달음은 개념화를 넘어선 것이라고 한다. 깨달음은 명상의 실천을 통하여 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형이상학적인 물음들이나 해명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누누이 폭로한다. 부처가 본 세계의 모습은 개념화를 넘어선다. 모든 사물은 불변의 실체성이 없다는 무아나 무상도 이런 맥락에서 성립한다. 현상에 보이는 것은 단지 조건적이라는 연기(緣起) 사상이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선사상의 이런 특성 때문에 선종에서는 개념과 사유의 한계를 분명히 한다. 그리하여 깨달음을 구현하는 방법으로 무심할 것을 주장한다. 이런 측면은 서양의 현대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그냥하는 것(just doing)’이 선종의 무심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관념이나 개념을 벗어난 마음으로 행위할 것을 선사들은 입이 마르도록 말한다.

 

그러나 당시 선종의 전등사를 편찬하는 이들이 보기에, 하택신회는 선종의 금기인 관념이나 사유를 매개로 부처의 체험을 분석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행위는 옳지 못하다는 비판이다. 때문에 관념이나 사유를 매개로 하여 점수를 주장하는 것은 선문의 금기 사항이다.

 

이런 입장에서 하택신회를 비판했다. 그 비판이 바로 “그대는 뒷날 수행도량의 최고 어른인 방장노릇도 못하고, 그저 한낱 알음알이나 내는 무리가 될 것이다(此子向後沒有把茅蓋頭, 也只成得箇知解宗徒)”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오무심을 표방하는 선종에서는 혜능스님의 이름을 빌어 개념이나 관념에 의한 수행론을 처단했다. 혜능스님 자신이 과연 하택스님을 그렇게 비판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육조단경』을 잘 읽어 보면, 혜능선사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모인 제자들이 모두 우는데 오직 하택신회 선사만이 조용히 있었다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 적에 모든 제자들이 울고불고 하는데 오직 가섭존자만이 조용히 있었다는 이야기를 연상하게 한다. 가섭존자를 부처의 수제자로 옹립하고 싶은 후세의 기록자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어쨌든 후세의 선문에서는 하택신회는 지해종도를 낙인 찍혔다.

 

4.

대수법진의 경우를 보자. 대수법진 선사는 위산영우 선사의 회상에서 여러 해 동안 수행을 했다. 모든 수행자들이 궁금한 점을 위산영우 선사에게 여쭙는데, 유독 대수법진 선사만이 그러질 않았다. 그래서 위산선사가 대수선사에서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한다. 그러자 대수는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이에 스승 위산선사께서는 “그러면 부처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어보라고 한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수는 선생님의 입을 틀어막는다. 이런 일이 한바탕 벌어지고 난 뒤에 위산영우 선사가 제자 대수스님에게 하는 말이 바로 ‘니이후유편와개두 멱개소지인야무’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대 (대수법진) 이후로 (나 위산은) 방장이나 주지 노릇을 하더라도 (너처럼) 일체를 싹 쓸어버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없을 것이다.)”이다. 모든 관념과 개념을 싹 쓸어버린 대수법진 선사를 칭찬하는 말이다. 부처라는 관념마저도 선사들에게는 무상한 것이다.

 

정갈한 법당에 앉아 있는데 홀연히 열반이라는 관념이 머리에 떠올라 그게 싫어서 침을 뱉는 백장선사를 우리는 기억한다. 또, 부처의 ‘부’ 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난다는 조주선사의 말도 있다. 개념화를 넘어선 것과 개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깨달음의 실상은 그런 것으로 포착하는 게 아니라, 무념을 통해서 즉자적으로 자기가 체험하는 것이다. 돈오무심이 아니고서는 석가가 체험한 세계를 경험할 수 없다. 이것이 선문의 여러 조사들이 공인했던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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