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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추모 기사]
사리탑, 21세기 선문화를 표출하는 전인적 인격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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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식  /  1998 년 3 월 [통권 제9호]  /     /  작성일20-05-06 08:36  /   조회9,11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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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식 /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장. 사리탑 자문위원

 

종교란 절대적 정신을 표상(表象)에 의하여 표현하게 된다. 표상이란 상징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종교는 의례(儀禮), 성상(聖像), 성화(聖畵), 구조물(構造物), 음악(音樂) 등에 의하여 표현하기 어려운 진리를 표출하게 된다. 

 

그런데 “불교가 무엇이냐” 하는 개념은 기독교와는 달리 참으로 다양하다. 예컨대, 사제팔정도(四諦八正道)라 할 수도 있고, 연기공(緣起空)이라 할 수도 있고, 삼학(三學)․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들은 그 어느 하나만을 가지고 말하여도 불교의 중심 개념에서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사리탑 모형

 

 

그런데 이와 같은 종교의 진리를 표출하는 데서 기독교와 불교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인다. 기독교의 종교화는 성체(聖體)나 예수의 수난 등을 그려서 성자(聖者)에 의한 설시적(說示的) 회화를 우리들에게 제공할 따름이다. 여기서는 극채색(極彩色)의 숭고성(崇高性)이 감동을 준다. 그러나 불교는 인격(人格) 전체의 표출이라 할 수 있고, 그것도 최고도(最高度)의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종교란 인간의 구극(究極)의 상(相)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구극의 상의 표출이라면 마땅치 인격 전체의 표출로서 최고도의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종교 그림은 기독교의 교의 내용을 납득시킬 만한 표현으로서 우리들에게 호소력을 가지지만 그것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십자가는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였다고 함을 우리들에게 알려 주지만 그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일단 무(無)의 심연(深淵)에 떨어지게 하여 원죄(原罪)를 체험시켜 그 무저(無底)에서 솟아나는 표현성은 찾아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들 능력의 일부를 촉발(이해)시킨 데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종교란, 인간 구극의 상에 관계되며 생사(生死)가 맞닿는 곳에 있으므로 인격 전체의 표출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즉 최심층(最深層)으로부터의 표출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미(宗敎美)가 숭고미(崇高美)로서의 품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미의 본체인 인격 전체의 표출이어야 하며 인격 전체가 완전히 좌절한 절대절명의 경지를 초월한 곳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불교적 표현은, 철저한 좌절을 체험하고 전인적으로 재생하는 전체적 인격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석가가 생로병사라고 하는 철저한 좌절을 체험하고 그것을 극복한 내용이 전인적 인격의 표출로서 불교가 성립되었음이 그와 같은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의 표현 방법과 비교해 말한다면, 기독교적 표현이 부분적이라면 불교적 표현은 전체적이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한편 불교적 표현도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의 표현에 차이점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토교의 경우에는 관경변상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전적으로 상징성을 가지고 타력적으로 표현함에 반하여 선(禪)의 경우에는 그 표현이 직절(直截)이라는 자력적 특징을 지닌다. 십우도(十牛圖)의 경우, 소나 자연경관 등 몇 가지 상징성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단번에 자르는 모양을 나타내고 있으며 어떤 종류의 간격이나 여유도 극히 희소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선화(禪畵)라고 할 수 있는 십우도에서 울긋불긋한 꽃송이는 산천대지를 그냥 그대로 표현하나 정토교의 변상도는 원래 자연적인 것을 다시 형상화하고 구상화한 이매지네이션에 의하여 환상화하고 있음이 다르다. 즉 선의 상징성과 정토교의 상징성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이다.

 

 

이 모형은 이중 반구 위에 구를 올려놓고 원둘레를 설치하여 영원한 시간성을 표현하고 있다.

 

 

성철 큰스님은 한국 불교가 낳은 선사 중의 대선사이다. 큰스님의 열반 이후 사리 친견 법회의 행렬이 줄에 줄을 이어 여간 선연(善緣)을 지은 불자가 아니고서는 몇 달을 두고도 그 친견이 불가능하였음을 당시의 수많은 보도 자료가 잘 알려 주고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큰스님에 대한 숭모(崇慕)의 염원은 단순히 불교계의 일시적 신앙심에 의거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대 대선사의 전인적 인격이 표출되는 현상이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후, 성철 대선사의 전인적(全人的) 인격의 표출을 구조물화하기 위한 논의가 백련암 문중을 중심으로 있었다. 그 모임에서 큰스님의 사리탑은 21세기를 대표하는 구조물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신중론이 대두되었다. 그것은 당연지사 중의 당연지사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철 대선사가 이 시대의 철저한 좌절을 체험하고 그것을 전인적으로 재생하였기 때문에 사리탑 역시 전체적 인격을 표출하는 구조물이 아니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상과 같은 의미를 지닌 성철 대선사의 사리탑 구조물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한 논의가 잇달았고, 그 결과 문도 및 사리탑자문위원들은 전국민의 관심과 지혜를 모아 사리탑을 건립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사리탑 설계 공모’를 하게 되었다. 그때 공모전을 발표하면서 단서를 붙이기를, 성철 대선사의 전인격을 표출하는 구조물은 단순히 재래적인 양식의 계승이기보다는 20세기를 고뇌하는 그를 극복한 결과로 나타난 숭고미를 오늘을 사는 모든 중생이 향유 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21세기를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숭고미를 향유할 수 있는 선문화(禪文化)를 대표하는 구조물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할 필요가 있었다. 건축설계의 전문가, 사리탑 구조물의 전문가, 불교적 의미 창출에 대한 의견 등 여러 의견들을 수렴하고 절충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설치미술가로 이름 높은 최재은 씨의 이미지 설계안을 가장 타당한 작품으로 선정하고 많은 토론을 거쳐 의견을 절충하였다. 이 설계안을 중심으로 수차에 걸친 회의를 통해 반구(半球)의 대좌 위에 구(球)의 구조물을 올려놓고 밖으로 원을 둘러 영원의 시간성을 표현한 설계를 최종 선택하고, 주변을 잘 정리하여 참배와 선적 사유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해 줄 것을 문도들에게 부탁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이중(二重) 반구의 대좌 위에 구를 올려놓고 원둘레를 설치한 구조물은 21세기를 내다보는 선적(禪的) 표출 양식에 가장 적합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왜냐하면 오늘의 고뇌는 결국 세계적 고뇌요 지구에 대한 고뇌인데 큰스님의 사리탑은 이 고뇌를 선적으로 표출 양식인 직절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큰스님의 사리탑 불사는 21세기를 맞이하는 세계인이 모두 함께 향유하는 문화공간으로 각광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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