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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面石]
고불총림 방장 서옹 큰스님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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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스님  /  1997 년 9 월 [통권 제7호]  /     /  작성일20-05-06 08:36  /   조회8,48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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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고불총림의 방장이신 서옹 큰스님은 1912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1932년 장성 백양사 만암 대종사 문하에서 득도하였다. 1941년 일본 동경의 임제대학으로 유학하여 당시 선 철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구송진일(久松眞一) 박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참사람주의’에 대한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64년 동국대 선학원 원장을 비롯하여 65~74년에는 도봉산의 무문관, 동화사, 백양사, 봉암사 조실을 역임하시고, 74~79년에는 조계종 제5대 종정을 지내셨다. 현재 고불총림 백양사의 방장으로 계시면서 임제선맥의 중흥을 위해 정진하시고 아울러 ‘참사람 결사운동’의 정신적 지주를 맡고 있다. 서옹 큰스님의 저서로는 <선과 현대문명> <절대현재의 참사람> <임제록 연의> 등이 있다. - 편집부 

 

 

 

 매미 울음소리가 단단히 여문 옥수수 알 사이로 사라집니다. 그 사이를 비집고 가을 풀벌레가 소리를 내보지만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을 씻어주기에는 아직 이른 듯합니다. 여름 해제를 하고 잠시 서울 백운암에 머무시는 틈을 타 고불총림 백양사 서옹 방장 큰스님을 찾아뵙고 흐뭇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을 내어 주신 큰스님께 두 손 모아 합장 삼배를 드립니다.

 

성철스님을 처음 뵈신 것은 언제였습니까?


향곡스님이 주지로 계시던 부산 선암사 선방에서 지낼 때였어요. 당시 성철스님은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정진하고 계셨는데(1952~54년까지 계심), 그때 찾아가 처음 뵈었습니다. 천제굴은 안정사에서 은봉암으로 올라가는 숲 길 중간쯤에 있었는데, 초가로 엮은 집 세 칸이 전부였습니다. 스님은 거기서 시자 한둘만 두고 조용히 정진을 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찾아뵈었을 때는 천제스님께서 큰스님 시봉을 하고 있었어요. 

 

거의 반세기 전에 가까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때 나누신 얘기는 주로 무엇이엇습니까?

 

수행정진하는 사람이 스님 찾아 길을 떠나는 거야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불법에 대해서, 특히 선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앙굴리마라 얘기를 하셨습니다. 다 아는 얘기지만, 앙굴리마라는 처음에 바라문으로 출가를 했어요. 스승이 출타한 사이 부인이 유혹을 했지요. 앙굴리마라가 유혹을 거절하자 스승의 아내가 모함을 하게 되었고, 분노한 스승은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천 명의 사람을 죽여 천 개의 손가락으로 목거리를 만들어 오면 법을 일러주겠다고 했습니다. 구백구십구 명의 사람을 죽이고 한 명만 더 죽이면 소원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천 번째 사람이 되었어요.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죽여야 하는데, 마침 부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앙굴리마라는 부처님의 깊은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참회하고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후에 존자의 지위에까지 오른 분입니다. 

 

“하루는 앙굴리마라가 탁발을 나가서 어느 장자 집에 이르렀다. 마침 그 집의 부인이 해산을 하는데 지독한 난산이라 아이를 낳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자 장자가 앙굴리마라에게 제발 자기 부인 좀 살려달라고 간청을 했다. 앙굴리마라는 자기는 중이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도력이 부족하니 부처님께 가서 여쭙고 와서 알려주겠다고 하고는 부처님께 달려갔다. 부처님께 아뢰자 부처님께서는 ‘너는 속히 가서 말하되, 내가 성인의 법을 따르고부터는 아직껏 살생하지 않았노라 하라”고 했다. 앙굴리마라가 가서 그 얘기를 전하자 그 부인이 순산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대혜 고선사가 말하였다.

 

華陰中山前百尺井이여

中有寒泉徹骨冷이라
誰家女子來照影고
不照其餘照斜領이라

 

화음산 앞 백척 깊은 우물이여
그 속에 차디찬 샘이 있어 뼈에 사무치도록 차다
뉘 집 여자 와서 그림자를 비추는가
다른 것은 비추지 않고 옷깃만 비추네.”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스님께서 뭐라고 물으시길래 대답을 하니, 스님께서는 “여러 선지식한테 물어도 대답을 못했는데 대답을 잘했다”고 하시더군요. 스님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화사한 햇살만큼이나 스님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자애롭기만 하다.

 

 

한국 불교사에 바로잡아야 할 어려운 난제 가운데 하나가 조계종의 종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방장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역사적으로 보나 현실적으로 보나 우리는 모두 서산스님의 문손(門孫)입니다. 그렇다면 서산스님은 누구의 법을 이었나, 바로 태고스님의 법을 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이미 역사적으로 확연한데 어찌하여 보조스님을 종조로 내세우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종풍을 보더라도 보조스님은 누구의 법을 잇지 않고 혼자 공부하여 선교를 섭렵했다고 하면서 돈오점수를 주창하는데, 조사선 5조 가풍의 어디를 봐도 돈오점수를 주장한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조스님은 조사선과는 거리가 아주 멉니다. 역사적 사실로도 그러하고, 종풍으로도 그러합니다. 조사스님들은 한 결 같이 돈오돈수를 말씀하시고 돈오돈수조차 초월하여 자유자재함을 말씀하셨는데, 돈오점수를 주장한다는 것은 교종이지 선종이 아닙니다. 조사선은 본래면목을 해결한 임제가풍이 제일의(第一義)입니다. 그 임제가풍을 석옥스님이 잇고 우리나라에서는 태고스님이 이었으니, 우리의 종조는 마땅히 태고스님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이런 점을 말살하고 보조스님을 내세운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도 안 맞고 진리상으로도 전혀 당치 않은 일입니다.

 

불교정화가 있기 전까지는 태고법통설에 의심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비구승단을 조계종이라 하면서 보조종조설 또는 보조법통설이 돌출했다고 봅니다만, 보조스님을 내세운 것은 역사를 망각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 역사를 무시한 꼴이 되었고, 조사선에 대해서도 무식함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았다고 봐야 합니다. 풍문으로는 비구와 대처의 분규를 해결하고 불교를 혁신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그랬다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성철스님께서는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 아래 결사를 주도하시면서 돈오돈수를 주창하시게 되는데, 그 의의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옛날 조사스님의 5조 가풍은 의심할 것 없이 돈오돈수입니다. 그러므로 보조스님의 돈오점수 영향으로 선종의 정신이 희미해져 가고 있을 때, 성철스님께서 옛 조사스님의 가풍을 역사적으로 입증하고 여실하게 살려내셨다는 데 무엇보다 큰 공로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성철스님의 노력으로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얼마나 각성했는지는 아직 문제로 남아 있다고 봅니다.

 

 

1969년 경. 보성 스님, 성철 스님과 가야산 등산길에서

 

 

아마도 당시의 큰스님들은 한국불교의 법맥에 대하여 충분히 비판을 하지 않고 그냥 보조스님을 숭배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성철스님의 돈오돈수가 한국 선 수행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그 당시 대부분의 큰스님들이 보조스님을 무조건 숭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종의 입장에서 보면 보조스님의 말씀이 어긋난 것도 아니고 또 보조스님 공부 방식이 누구든지 쉽거든요. 중요한 것은, 돈오돈수도 수행과정이지 구경(究竟)은 아닙니다. 절대 필요한 수행과정입니다. 돈오돈수라야 견성(見性)할 수 있습니다. 돈오점수로는 옳게 견성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돈오돈수의 돈오와 돈오점수의 돈오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돈오돈수의 돈오는 ‘진여자성을 아는 것’이고 돈오점수의 돈오는 ‘진여자성을 지해로써 아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조사선은 본래면목 그 자리로 완전히 전환하는 것인데, 지해(知解) 차원에서 그 자리를 향해서 수행해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아주 차원이 다른 이야기로서, 지해 차원과 의식 차원과 본래면목 차원은 전혀 다릅니다. 본래면목 차원은 연속되는 차원이 아닌데, 자꾸 연속해서 간다고 하면 잘못된 게지요.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돈오돈수를 주창하신 것은 조사선을 그대로 살려내신 겁니다.

 

성철스님께서 주창하시는 돈오돈수 중에 ‘오매일여’ 경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성철스님께서는, 화두를 가지고 교류문답식으로만 해서는 안 되고 실제 경지를 봐서 오매일여가 되어서 뒤집어져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옛날 선사들도 경지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일거일동이 참말로 그 자리에서 활발발 자유자재하게 살아 있느냐 그렇지 아니하냐의 경지를 보고 문답을 했지 그냥 문답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오매일여도 과정이지 구경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자리가 되어야 자유자재해집니다. 옛날 조사스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이 말씀을 하셨는데, 근래에는 성철스님만이 그 자리를 역설하신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도 일부에서는 선기(禪氣)가 번득이는 법거량들이 즉석에서 오고갔는데. 성철스님은 후학들에게 “동정에 화두 되나?, 꿈에도 화두 되나?, 오매일여가 되나?” 하고 물어서 안 된다고 하면 “그게 안 되면 법담할 필요 없다” 하고 물리치니 수자들의 불평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법거량을 하면 되었지 성철스님께서는 수좌들을 잘못 지도하신 게 아니냐 또는 확실한 견처(見處)가 없으셨던 게 아니었나 하는 시각들도 있습니다.

 

 

옛적 서릿발처럼 차가운 임제선맥의 중흥이 높은 누각처럼 세워지길 원하시며..

 

 

옛날 조사스님들이 모두 오매일여를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문답으로 경지를 보고 서로 탁마하며 실제 구경의 경지로 나가기도 했는데, 지해로 해서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말만 안했다 뿐이지 문답을 하고 실제 경지가 올바로 탁마되었다는 것은 바로 오매일여의 경지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경지는 따라가지 않고 지해로 화두를 천착하면서 말만 따라가니까 그 병폐를 구제하기 위해 특별히 오매일여를 주창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옛 사람들은 참 진지하게 문답을 해서 오매일여의 경지를 투과해 버렸지 말끝에서 문답을 한 게 아닙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오매일여를 투과해 버린 자리는 돈오돈수의 견성과는 다릅니까?

 

참선을 해서 견성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조사선의 구경의 자리는 아닙니다. 돈오돈수해서 견성을 했다고 해도 조사선의 구경의 자리에까지 가야 합니다. 조사의 대표격인 임제스님도 견성은 했지만 인가를 못 받았다가 여름안거 도중에 들어왔다 나가면서 황벽스님께 후려 맞고 이 일을 의심하고 다시 들어와 여름안거를 마치고 나가면서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파하(破夏)인연이라고 합니다. 백장스님도 마조스님과 들오리(野鴨子) 문답에서 견성은 했지만 마조스님의 할에 3일간 귀가 먹었다가 거기서 참으로 깨닫게 되어 인가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견성을 했다고 다 된 것이 아니라 미진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조스님 문하에도 80여 선지식이 있지만 최후까지 가서 정안종사가 된 사람은 한두 사람뿐이라고 했다. 그 경지가 분명하므로 견성했다, 돈오돈수했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돈오돈수 한 뒤에도 그 깊이에 실제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만 아주 구경에 가서 해결이 된 사람은 차별이 없다고 봐도 됩니다. 바로 그 자리에 가면 차별이 없어져서 중생이나 부처가 하나이므로 심천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일본에 가서 정진도 하시고 임제선에 대한 연구도 많이 하셨는데, 당시 제방 선원의 수준은 어떠했습니까?

 

일본에서도 문답할 때는 조금의 지해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경지를 중요하게 여기고 문답을 하는데, 문답에도 깊고 얕음이 많습니다. 말하자면 동정일여한 경지도 있고, 몽중일여한 경지도 있고, 오매일여한 경지도 있고, 오매일여한 경지를 투과해서 자유자재한 경지도 있고, 그러한 자유자재한 것도 투과해 버린 더 참 자유자재한 경지도 있습니다. 제가 본 바로는, 일본선은 동정일여의 경지에서 서로 거량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동정일여가 되면 아뢰야식을 타파하지는 못했지만 지해는 떨어진 순수한 의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웬만하면 동정일여가 되겠지만 그런 경지는 통 불문하고 문답에만 빠지고 있다고 봅니다. 실제 경지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여러 화두에 대해서 어떻게 보느냐 서로 천착하고 말에만 이끌리고 있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철스님께서 한 10여 년 종정을 하시면서 해인사와 백련암 외에는 일체 출입을 안 하시니까 타 종교 보다는 사회와 역사를 인식하는 수준이 뒤지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많이 받았습니다. 스님께서도 어려운 시절에 종정을 지내셨는데, 이런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종단의 종정이 되면 책임이 있지요.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고쳐주고 여러 가지 참여를 해서 바로 잡아주기도 해야 하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 종단은 참여해서 잘하려고 하면 오히려 간섭과 시비에 빠져들기 쉽상입니다. 그러니 산속에 계시면서 덕화로 중생교화를 하신 게 더 잘하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철스님께서 수좌들에게 주신 오계 가운데 ‘책 읽지 말라’는 문구를 두고 비판적인 말들이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책을 많이 보시고 무척 아끼셨으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게지요?

 

그런 말은 한국 불교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데서 오는 망발입니다. 당시 스님이 책을 보실 때는 지도받을 만한 선지식이 없는데다가 조사선의 정통도 희미해져 있어서 그것을 살리기 위해 책을 보신 겁니다. 그러나 수좌의 입장에서 참선에 들거나 나갈 때는 경이든 조사어록이든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당시의 풍토에서 필요했기 때문에 책을 보셨던 것이고, 그렇게 해서 조사선을 밝혀 놓았으니 이제는 굳이 책을 보지 말라고 당부를 하신 겁니다.

 

평소 성철스님께서는 내 법이 누구한테 받아서 누구한테 전했다라는 말은 하지 말고 “내 법을 알려거든 본지풍광과 선문정로 두 권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요?


 

 

사실 조선의 불교탄압과 일제의 말살정책에 의해 법맥이 희미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경허스님, 용성스님께서 새로 일으켜 세우기는 했지만 실제 조사선의 구경에까지 이르렀느냐 하는 것은 문제로 남습니다. 또한 법맥은 사람과 사람이 전한 게 아니라 활발발한 그 자리에서 이어졌다고 봅니다. 옛날 조사스님은 자기 법사(法嗣)를 쳐부셨지요. 만약 법사의 업을 이었다고 하면 죽은 게 됩니다. 그러니까 퇴옹 큰스님의 법을 이은 자손이 나온다면 실제 본지풍광과 선문정로를 태워버리는 자유자재한 경지에까지 가야 하리라고 봅니다.

 

스님과 저희 큰스님은 세속의 나이도 갑자년 동년배이시고 교류도 많으셨는데, 떠나신 스님께서 한국 불교사에 어떤 공적을 남기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성철스님께서 돈오돈수와 오매일여를 주창하심으로써 문답에만 천착하던 당시의 선불교의 병폐를 구제하셨고, 실제 경지를 문제 삼음으로써 조사선을 살려내신 것이 가장 큰 공적입니다.

 

지면을 통해 요즈음 수좌들에게 가르침을 한 말씀 주십시오.

 

요즈음 수좌들 보면 공부를 참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구경의 자리에 이르도록 지속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속을 안 하면 해결이 안 됩니다. 참선은 보통 수행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화두를 해결하면 생사를 초월하여 영원히 사는 것이고, 해결하지 못하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깨달은 경지에서 자유자재해지기 위해 뒤집어 엎을려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음으로 대용심으로 달려들어야만 합니다. 수좌들이 산중에서 고요히 앉아 있으니까 겉으로 보면 신선같이 보일런지 모르지만 공부하는 사람은 마치 전쟁터에서 생명을 걸고 싸우는 이상의 용맹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용맹심이 쉽게 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일어나면 순일(純一)하게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백암산의 그윽한 자취와 호방한 정기를 가득안은 백양사 경내

 

 

고불총림 백양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참사람 운동’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참사람’이라는 뜻은 인간은 첫째 감각이 있고, 감각을 지배하는 이성이 있고, 이성보다 더 깊은 자리에 영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즘 강조되는 휴머니즘 인간주의 즉 이성을 지배하는 영성자리에 살자는 것이 참사람 운동입니다. 서구유럽은 르네상스 이후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전환되었고, 게다가 과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간의 삶은 유례없는 풍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현대 사회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과학문명의 노예가 되어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참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가’ ‘어떠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자기반성을 통해 항상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끝으로 저희 큰스님을 대신하여 저희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후손들이 더 잘 알고 있겠지만 성철스님은 조사선을 살리기 위해 평생을 순일하게 살다 가신 훌륭한 대선사이십니다. 그 분의 뜻을 잘 받들어 성철스님을 뛰어넘는 후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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