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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바른 길]
자나깨나 한결같음 寤寐一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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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철  /  1998 년 9 월 [통권 제11호]  /     /  작성일20-05-06 08:33  /   조회10,637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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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철 /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앞의 7장 보임무심(保任無心)에서, 선(禪)의 수행은 번뇌습기(煩惱習氣)를 차츰차츰 닦는 게 아니라 그저 무심(無心)한 경지를 지키는 것일 뿐이라고 해서 돈수(頓修)의 의미를 밝혔다. 자나 깨나 한결같이, 간단(間斷)없이, 무심할 뿐인 것이다. 이것을 공부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기준이 오매일여이다.

 

 


 

 

오매일여는 더 자세히 세 가지로 나눈다. 동정일여(動靜一如), 즉 움직일 때든 가만히 있을 때든 한결같은 것이 첫째요, 몽중일여(夢中一如) 또는 몽교일여(夢覺一如), 즉 꿈속에서나 깨어 있을 때나 한결같은 것이 둘째이며, 숙면일여(熟眠一如), 즉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에서나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도 한결같은 것이 셋째이다. 이 세 단계를 다 통과해야 한다고 해서 삼관(三關), 즉 세 개의 관문이라고 일컫는다.

 

동정일여와 몽교일여는 보살 10지(菩薩十地) 가운데 7지(七地)에 해당하고, 숙면일여는 8지 이상과 불지(佛地)에 해당한다고 한다. 나아가 특히 부처의 경지를 보살의 경지와 구별해서 진여항일(眞如恒一), 즉 늘 오직 참된 그대로일 뿐인 경지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러한 여래의 경지〔如來地〕만이 진정 궁극적인 무심〔究竟無心〕이요 그 아래 보살의 경지는 가무심〔假無心〕, 무기무심〔無記無心〕이라고 한다.

 

이런 구도를 도입하여 성철스님이 말하려는 실제 수행상의 지침은 분명하다. 10지보살(十地菩薩)조차도 - 그 이하는 말할 것도 없고 - 아직 견성하지 못하고 깨치지 못했으니 무명망상(無明妄想)에 끄달리는 중생임에는 근본적으로 여느 중생과 다를 바 없는지라, 철저히 한결같아야 한다는 이 오매일여의 기준에 의거하여 늘 엄격히 스스로 점검하면서 끊임없이 치열하게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수행 경지의 계위와 관련하여 성철스님의 돈(頓)의 구호와는 모순되게 점(漸)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성철스님이 여러 곳에서 그런 혐의를 살 만한 이야기를 하는 게 사실이다. 어떤 곳에서는 경지의 점진을 인정하는 듯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한 예로, “등각(等覺)의 경지에서, 가장 미세한 망념인 제8뢰야(第八賴耶)까지 금강심(金剛心)으로써 끊어버리고 묘각(妙覺)으로 단박에 들어가는 것을 견성(見性) 또는 성불(成佛)이라 하나니 이것이 돈오(頓悟)”라고 해서 (『선문정로』78쪽), 견성해서 단박에 깨친다는 것은 여러 겹의 무명망념을 차근차근 잘라 없애면서 차차 높은 수행의 단계를 밟아 오르다가 마지막으로 제8식의 미세망념까지 끊어 버리는 그 순간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다면 성철스님이 비판하여 마지않는 점수론자(漸修論者)인 종밀(宗密)스님이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돈오돈수설에 대해서 비평할 때 이야기했고, 또 근래의 돈점논쟁에서도 여러 학자가 지적했듯이, 돈오돈수라 하여도 돈오에 이르기까지는 무량겁(無量劫) 동안의 점차 닦음이 필요하다는 뜻이 되고 만다.

 

성철스님이 ‘무량겁’이라고 수식될 만한 치열한 수행의 노력을 무조건 쓸데없다고 무시하기는커녕 엄격히 강조하고, 당신이 직접 실행했음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바탕에는 분명히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경지의 발전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수행관이 깔려 있다. 그렇다면 성철스님은 돈수를 내세우면서도 점수를 강조하는 모순을 저지르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한편, 성철스님은 모든 계위를 차근차근 다 밟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을 말한다. 대혜(大慧)스님이 7지에서 구경지(究竟地)까지 곧바로 뛰어넘은 예를 드는 등, 견성만 하면 여래의 경지에 곧바로 들어가므로 돈오란 점진적인 수행계위를 뛰어넘는 것임을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다.

 

“망령된 생각이 다 없어지면 자신의 본성을 분명히 보고, 자신의 본성을 분명히 보면 바로 이것이 깨침이며 무념 경지이니, 지위와 계급을 차례로 거치지 않고도 궁극적인 깨침인 부처의 경지에 단박에 들어간다. 이것이 한 번에 뛰어넘어 곧바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는 묘한 비결이며, 다른 종파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선문(禪門)의 특징이다.”(『선문정로』 80쪽)

 

이처럼 서로 다른 듯한 두 가지 이야기가 어떻게 한 자리에 있을 수 있는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선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성철스님이 깨치기 전의 수행을 두고 다분히 점(漸)으로 묘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돈오와 짝을 지어 돈수라고 표현하는 수행과는 같은 수행이 아니다. 이 점은 조금만 따져보아도 명백한데도 흔히 간과 내지 망각되곤 하는 것 같다. 돈오이전의 수행은 깨침과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수행이요 방편의 수행인 반면, 돈오와 짝을 이루는 돈수는 깨침과 닦음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이야기하는 닦음이다. 깨치지 못한 중생의 현실 속에서는 수행경지를 점차 진전시킨다는 것이 그런 대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구경각(究竟覺), 즉 궁극적인 깨침을 두고 볼 때에는 그 모두가 깨치지 못한 행위일 뿐이요 점차 진전되는 수행계위도 아무 의미의 차이가 없다. 깨치지 못한 자리에 해당하는 것이 깨침을 위한 매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못 깨친 자리의 생각과 행위에다가 의미를 부여하며 안주함은 궁극적인 깨침만을 문제 삼는 수행자에게는 치명적인 일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성철스님은 궁극적인 깨침에 못 미친 경지에 타협하여 안주하지 않는, 부단하고 간절하며 치열한 실수(實修)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성철스님이 돈오 이전의 수행을 사실상 점진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면서도 점(漸)을 극력 부정하는 의도를 짐작할 만하다. 점차를 인정하면 그 계위 하나하나에 의미와 가치를 두는 셈이 되는데, 거기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을 경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못 깨친 자리에 속하는 경지는 그것이 아무리 고매하다고 해도 궁극적인 깨침에 비추어 볼 때에는 무가치함을 깨닫고 수행의 노력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성철스님의 수행론을 두고 아무런 수행의 노력도 필요 없다는 뜻이라거나 ‘돈수’, 즉 ‘단박 닦아 마친다’라는 말의 어감을 흔히 오해해서 ‘쉽다’는 뜻으로 생각함은 그릇된 것임에 분명하다. 원융(圓融)스님도 그런 지적을 했다. ‘돈수’란 돈오한 위에는 못 깨친 자리에서 행하던 수행방편이 필요 없음을 말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간화선』 237쪽). 그러니까 돈수설은 돈오 이전의 수행방편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다만 (1) 깨침은 더 이상 깨침을 기대하며 행하는 대오(待梧)의 수행방편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완벽한 깨침, 즉 궁극적인 증오(證悟)여야 하며, (2) 점진하는 수행계위라는 방편은 깨쳤냐 못 깨쳤냐만을 문제삼는 자리에서는 전혀 무의미할 뿐 아니라, 궁극적인 깨침이 아닌 경지에 가치를 두고 타협하게 함으로써 수행에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는 뜻을 표방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이 점은 다른 것이 끼어 들 틈새 없이 순일한 의단(疑團)만으로 끊임없이 간절하게 이어지는 것을 생명으로 하는 화두참구를 견성의 첩경으로 극력 강조하는 것과도 연관되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점진적인 수행계위에 매달릴 필요가 없음을 말하면서도, 오매일여만은 생략될 수 없는 관문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일차적인 뜻도 동정일여에서 몽교일여로, 그리고 숙면일여로 나아가는 수행계위의 점진을 말하는데 있기보다는, 궁극적인 깨침에 못 미친 자리에서 멈추고 마는 것을 경계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오매일여는 엄연히 실제로 경험되는 경지인데도 그게 어디 가능하겠냐고 의심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도 닦는 이들의 병”인 바, 대혜스님과 같이 오매일여를 이루고서도 “눈 밝은 스승을 만나 마음을 돌리고” 끊임없이 닦을 일이지(『선문정로』 108쪽), “오매일여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하고서 돈오견성이라고 자부한다면 이는 자기를 속이고 남도 속이는 큰 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도를 닦는 과정에 있어서 극히 두려워해야 할 병이요 장애”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선문정로』 106쪽)

 

더군다나, 오매일여를 이루었다고 해서 거기서 수행을 마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가장 결정적인 대목이 남아 있다고 한다. 즉, 죽음과도 같은 무기(無記)의 상태에서 크게 살아나야〔大活〕 한다고 역설한다. 이 점은 다음 9장 「사중득활(死中得活)」에서 이야기된다. 요컨대, 성철스님이 오매일여를 강조하는 뜻은, 수행자로 하여금 끊임없는 수행의 노력을 궁극적 깨침 이전에 완화시키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자기를 점검하는 잣대로서 들이대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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