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책소개
붓다의 길에서 이루어지는 ‘이해 깨달음과 마음 깨달음을 통한 향상의 여정’은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는 영역 범주로의 진입’과 ‘마지막 경계선을 넘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 또한 마지막 경계선을 넘기 이전까지는, 누구나 언제든지 변화되기 이전의 상태로 퇴행할 수 있다. 이해수행으로 수립한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는 이해’와 마음수행으로 체득한 ‘붙들지 않는 마음자리’는, 모두 깨달음 영역 범주로의 진입이 선행되고 이후 마지막 경계선을 넘어섬으로써 완결된다. 따라서 깨달음 영역 범주에 진입한 이후로는, 마지막 경계선으로 나아가는 ‘익힘의 행보’가 필요하다. 돈오견성의 경우, ‘돈오견성 영역 범주 진입 이후 마지막 경계선 문턱’까지의 범위에 해당하는 돈오견성은 ‘미완결형 돈오견성’이다.그러나, 퇴행을 부추기는 환경적 조건과 맞물려 이 ‘익힘의 노력’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약화시킬 때는, 누구나 언제든지 진입한 ‘돈오견성 영역 범주’ 이전으로 퇴행할 수 있다. 또한 언제든지 노력에 따라 재진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경계선을 넘어서면 더 이상의 퇴행은 없다. 이해수행으로 수립한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는 이해’와 마음수행으로 체득한 ‘붙들지 않는 마음자리’의 결합 및 상호작용 수준이 정점에 이를 때, 이 마지막 경계선을 넘어선다. 깨달음의 완결적 이룸이다. 붓다가 된다. 이 책은 언어인간이 재인지사유를 통해 어디에도 붙들리지 않는 완결형 돈오견성에 이르는 선禪 수행에 대한 탐구를 진지히게 하고 있다.
한편 이 책이 수립한 선 사상과 선 수행에 대한 새로운 독법인 〈그 법설의 언어가 지시하는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성찰하는 ‘연기적 사유 밥법론’〉은 지눌과 성철의 언어를 읽는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이 길은 지눌의 ‘이해에 의한 깨달음’(解悟)과 그에 의거한 돈오점수 그리고 그에 대한 성철의 비판을 둘러싼 학계와 불교계의 배타적 쟁론 양상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이것은 지눌과 성철에 대한 이해와 평가의 틀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지눌과 성철이 합세하여 열어주는 길은,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이 각자의 구분되는 역할을 제대로 보전하면서도 상호관계와 상호작용이 고도화되는 길〉이다.
아울러 이 책에서 제시한 새로운 독법과 방법론은, 선 사상과 선 수행 및 불교학 탐구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붓다를 만나는 새로운 길, 붓다의 길을 펼치는 새로운 방식의 수립에도 일조할 것을 기대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반도 토착 불교지성을 대표하는 원효, 지눌, 성철의 불교 이해가 이 새로운 독법을 지지하는 성찰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원효와 지눌, 성철은 한반도 토착 불교지성인 동시에 세계적 거봉들이다. 이들이 함께 열어주는 길에서 피어나는 만다라曼陀羅는 오래전 붓다가 열어준 중도中道의 길이면서 지금 우리가 넓혀 가야 할 길 - 그 ‘오래된 새길’의 경이로운 장관壯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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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불학총서는 불교사상, 불교수행, 불교신행, 불교문화 등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심도깊게 담아내는 불교학 총서로서 ‘지혜와 마음의 등불’이 되고자 합니다. 접
저자소개
고려대 대학원에서 불교철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 울산대 철학과에서 불교철학, 노자, 장자철학을 강의. 주요 저서로는 『원효전서 번역』, 『대승기신론사상연구』, 『원효,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 『돈점 진리담론 –지눌과 성철을 중심으로』, 『원효의 화쟁철학 –문門 구분에 의한 통섭』, 『원효의 통섭通攝철학 –치유철학으로서의 독법』,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 -이해수행과 마음수행』 등이 있다.최근작 :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원효의 통섭철학>,<[큰글자책]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읽기 > 등
목차
■ 머리말: 오래 품은 보따리■ 【내용 개요】
1. 궁극실재 - 매혹적 환상
2. 세 가지 길
3. 붓다의 길은 궁극실재를 향하는가?
4. 이해와 마음
1) 이해
가. 언어인간의 등장과 언어능력의 진화
나. ‘이해능력의 발현’과 ‘인과관계의 이해’
2) 마음
가. 생명의 원초적 창발성과 마음
나. 사유의 두 면모: 이해와 마음
5. 이해수행과 마음수행
1) 이해수행
2) 마음수행
3)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의 관계와 결합의 정점
4) 선禪 수행의 두 축: 위빠사나와 사마타
가. 위빠사나와 사마타는 모두 정학定學 선 수행이다
나. 현대 위빠사나 명상
5) 위빠사나와 사마타 수행은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의 문제인가?
6) 사마타 마음수행은 집중수행인가?
7) 지관止觀 수행론과의 관계
6. 유식무경唯識無境과 알아차림(正知, sampajānāti)
1) 유식사상을 읽고 있는 관점들과 의문
2) 유식사상 고유의 관심과 취지
3) 유식무경唯識無境과 알아차림(正知, sampajānāti)
가. 유식무경의 의미와 취지
나. 알아차림의 의미와 취지
ⅰ) 사념처에서의 관찰(觀, passati)과 알아차림(正知, sampajānāti)
ⅱ) 〈‘특징적 차이’(相, nimitta) → ‘개념적 지각/인지’(想, saññā) →
알음알이(識, viññāņa)〉의 인과적 연관과 두 가지 인과계열
ⅲ) 육근수호六根守護 법설과 알아차림
그리고 심일경성心一境性(cittekaggatā)
다. 유식무경과 알아차림의 만남
7. 원효의 일심一心: 이해수행과 마음수행 융합의 정점 범주에서의
인지적 국면
1) 일심一心을 읽는 시선과 궁극실재의 연루
2) 일심一心 현상을 발생시키는 조건들: 일심에 대한 연기적 독법
가. 공관空觀을 품은 유식관唯識觀
나. 방편관方便觀과 정관正觀
다. 지관쌍운止觀雙運
3) 이해수행과 마음수행 그리고 일심一心
가. ‘공관空觀을 품은 유식관唯識觀’의 의미
나. ‘방편관方便觀과 정관正觀’의 의미
다. ‘지관쌍운止觀雙運’의 의미
라. ‘일심一心’의 내용과 의미
8. 선종의 돈오견성頓悟見性 : 마음수행의 창발적 전개
1) 돈오견성을 읽는 두 시선 : 이해 독법과 신비주의 독법
2) 돈오견성頓悟見性과 마음수행
가. 혜능慧能과 돈오견성
ⅰ) 돈오頓悟와 무념無念 법문
ⅱ)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無住 법문
ⅲ)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無住 법문의 시사점
ⅳ) 좌선坐禪 법문
ⅴ) 혜능 선 사상의 전승
나. ‘무념無念의 돈오견성頓悟見性’과 붓다의 마음수행
다. 돈오견성의 두 유형 : 미완결형과 완결형
ⅰ) 돈오 범주에 관한 선행 담론
ⅱ) 미완결형 돈오견성과 완결형 돈오견성
3) 마음수행의 창발적 전개
가. 일깨우고 드러내는 대화법에서의 창발적 특징 :
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의 대화법
나. 화두話頭 의심과 돈오견성의 결합: 간화선看話禪
ⅰ) 돈오견성 방법론의 창발적 전개 - 화두話頭 의심
ⅱ) 화두 의심疑心은 왜 돈오견성으로 이어지는가?
9. 성철은 왜 돈오점수를 비판했을까?
1) 두 가지 쟁점 담론과 성철
2) 지눌의 문제의식과 돈오점수
3) 성철의 문제의식과 돈오점수 비판
4) 돈오점수 비판의 의미 -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의 차이’와 관련하여
가. 의미 도출을 위한 방법론
나.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의 차이 구분과 성철
다. ‘돈오점수 비판’과 ‘간화선 돈오돈수’ 그리고 현대 한국 선불교의
문제 상황
라. 지눌과 성철이 함께 열어주는 길
【부록1】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rtha)는 어떻게 붓다가 되었나?
【부록2】 무아는 1인칭의 삭제인가, 새로운 1인칭의 등장인가?
【후기】 출간에 즈음하여
■ 찾아보기
책속으로
88쪽이러한 선정 수행론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하나는, 삼매 수행을 ‘대상에 대한 집중’으로 보는 관점이 지닌 문제이다. 이 점은 뒤에 다시 거론한다. 다른 하나는, ‘현상의 속성을 발생시키는 궁극실재’를 설정하는 관점이 지닌 비非불교적 전제이다. 자기 동일성을 영속적으로 유지하면서 가변적 현상의 속성을 발생시키는 궁극실재는 없다. 따라서 〈궁극실재를 직접 볼 수 있다〉라는 주장은 거짓 명제이고, 〈삼매에 들어 궁극실재를 직접 보았다〉라는 체험담은 허세나 착각이다. 또 무상·고·무아에 대한 통찰은 무상·고·무아 현상의 기체基體인 궁극실재의 체득에 수반되는 것이 아니다. 〈궁극실재를 보면 무상·고·무아를 ‘완전히 그리고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라는 기대는, 궁극실재를 향한 갈증의 자기 최면일 뿐이다. 전능의 궁극실재를 향한 짝사랑이다. 이 짝사랑은 비단 남방불교 교학뿐 아니라 북방 대승불교 교학과 현대 불교학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목격된다. 불변·독자·전능의 궁극실재는 없다. 붓다의 길, 그 중도에 오를 때, 무엇보다 먼저 분명히 간택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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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쪽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의 ‘분리될 수 없는 상호 의존’은 양자의 융합이고도화되는 단계에서 ‘상호관계의 정점’에 이른다. 이 정점의 융합 단계로서는, 〈그 어떤 이해도 붙들거나 그에 머물러 제한받지 않으면서 이해를 굴리는 인지능력 지평〉,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이해’에도 갇히거나 붙들어 집착하지 않는 좌표에 역동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이해’를 운용하는 인지능력 지평〉, 〈모든 유형의 관념·느낌·욕망·행위·의지·심리·이해 양상에서 끝없이 풀려나면서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이로운 관념·느낌·욕망·행위·의지·심리·이해 양상’을역동적으로 조정하면서 펼치는 인지능력 지평〉이 밝아진다.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의 상호 결합으로 구현되는 향상의 정점 범주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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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쪽
〈모든 현상을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으로 보아 ‘성립/발생의 조건들’과 ‘조건들의 인과적 연관’을 포착하려는 사고방식〉이 연기의 원형 사유로 보인다. 그리고 〈현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현상을 발생시킨 조건들과 그들의 인과관계를 성찰하라〉는 것이 이러한 연기적 사유의 철학적 의미라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등장한 연기 교학들은 이러한 철학적 의미의 구현 사례들이다. 이 철학적 의미의 적용 범위는 전방위적이기 때문에 새로운 적용과 구현 사례들은 무궁하게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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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쪽
알아차림(正知, sampajānāti)과 유식무경唯識無境, 원효의 일심, 혜능의 무념을 관통하는 것은, 〈‘불변성·동일성·독자성 관념에 오염된 인식·경험·이해’(分別)의 인과계열 및 범주에서 한꺼번에 통째로 빠져나오는 마음 국면에 눈뜨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상의 차이(相)들을 왜곡하여 차별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관계 맺을 수 있는 마음자리에 역동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능력〉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일상의 탐구적 의심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인 동시에, 대부분 ‘불변성·동일성·독자성 관념에 오염된 인식·경험·이해’(分別)의 인과계열 및 범주 안에서 작동한다. 따라서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의심’을 통해 결정하는 답 역시 ‘불변성·동일성·독자성 관념에 오염된 인식·경험·이해’(分別)의 변주變奏가 된다. 그 답은, ‘불변성·동일성·독자성 관념에 오염된 인식·경험·이해를 수립하고 변형·발전시키면서 관리해 가는 마음 방식’(心生滅門)에 종속되어 있다.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의심’(將迷待悟)으로써 확보하는 어떤 해답도, ‘분별의 인과계열’을 전개하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의 마음 방식’ 손아귀에 있다.
머리말
오래 품은 보따리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 불문佛門을 만난 직후부터 필자가 품어 온 질문이자 지속된 탐구 과제이다. 20대 후반에 선문禪門을 통해 불문佛門 안길에 들어 지금 정년퇴임 후 2년이 지났으니, 근 40여 년이 지나갔다. 이 질문을 굴린 지 40년이 넘은 셈이다. 필자에게는 가장 해묵은 보따리다.
선문의 길에서 나름대로 쉬는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때의 환희가 아직도 생생하다. 대학원 진학 후에는 불가佛家에 쌓인 다양·다층의 지혜들을 폭넓게 음미하면서 보따리를 채워 갔다. 원효와 대화하면서는 그의 깊이와 넓이에 경탄하였다. 니까야를 통해 붓다와 대화하면서는 ‘연기적緣起的 사고’의 의미가 교학 전통에서 제시된 연기 해석학을 넘어선다는 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모든 현상은 조건들에 의해 발생한다.”라는 연기법 명제에서 “어떤 현상을 이해하려면 그 현상을 발생시키는 데 관여하는 조건들을 파악해야 한다.”라는 의미를 읽고 나니, 모든게 새로웠다. 12연기, 공空연기, 유식唯識연기, 법계法界연기 등의 연기 교학 어느 하나에도 갇히지 않는 상위의 보편원리가 연기법이라는 점에 환호하였다.
연기적 사유의 의미를 이렇게 읽으니, 니까야가 전하는 붓다의 길에 놓인 모든 것이 거듭거듭 새롭게 읽혔다. 원효와의 대화도 갈수록 새로워졌고, 남북의 모든 교학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불교 언어를 넘어 일상과 세계의 모든 현상이 연기라는 거울에서 새롭게 드러났다. 동·서양 고금古今의 성찰들을 능동적으로 음미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연기적 사유였다. 연기법의 의미가 이렇게 읽히자, 〈선 수행이란 무엇인가?〉에 답해 보려 채워 가는 보따리 안도 풍요로워졌다.
붓다의 길 위에 배열된 보배들의 가치는 연기적 성찰로 읽어야 제대로 드러난다. ‘보배의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충분히 읽어낼수록, 보배의 내용과 의미가 제대로 이해된다. 붓다의 길 위에 깔린 보배들을 다루어 온 교학들도, ‘보배의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읽어내는 수준에 따라 그 타당성 수준도 결정된다. 붓다의 법설을 다룰 때, 모든 교학이 연기적 성찰을 충분히 적용한 것은 아니다. 특히 ‘마음수행으로서의 선 수행’에 관한 붓다의 법설에 대해서는, 남북 교학 모두 연기적 성찰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타, 사선四禪, 사념처四念處, 육근수호六根守護 법설의 알아차림(正知, sampajānāti) 등을 교학적으로 해석할 때, ‘발생시키는 조건들과의 관계’에서 탐구하는 경우를 목격하기 어렵다. ‘마음수행으로서의 선 수행’에 관한 언설들이 지칭하는 현상들은, 그것이 어떤 조건들의 인과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인지를 살펴야 선 수행의 길이 보인다. 그 길의 특징, 오르는 방법, 행로, 이정표와 목적지를 전망할 수 있게 된다. 원효나 선종의 마음수행 관련 언어들도 연기적 성찰로 탐구해야 그 언어들이 지시해 주는 길이 제대로 보인다.
붓다는, 자신이 언어로 지칭하는 현상들의 발생 조건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언어를 연기적으로 구사하는, ‘연기적 언어 용법’을 펼치고 있다. 지칭하는 현상의 발생 조건들을 명확히 하면서 언어를 구사하는 최초의 인물로 보인다. 현상을 관통하는 연기의 이법理法을 깨달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붓다의 연기적 언어 용법은 그의 모든 법설을 관통하고 있다. 선 수행에 관한 가르침도 예외 없이 연기적 언어 용법으로 펼친다. 선 수행의 목적과 특징, 선 수행에서 발생하는 현상들, 선 수행의 방법 등을 모두 ‘그것을 발생시키는 조건들’과 관련시키면서 설한다. 니까야를 통해 붓다와 대화할 때는, 무엇보다 붓다의 연기적 언어 용법을 음미해야 한다. 37조도품으로 분류되는 법설을 대할 때, 그 법설의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유심히 살펴야 한다. 또한 니까야 편집과 전승 과정에서 혹 제자들이나 후학들의 기억이나 이해 문제로 빠져 버린 조건이 있을 가능성, 엉뚱한 조건이 추가되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필자가 니까야에서 붓다의 육성을 포집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중시하는 것은, ‘연기적 언어 용법’의 정도와 수준이다. 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유심히 살펴야 한다. 또한 니까야 편집과 전승 과정에서 혹 제자들이나 후학들의 기억이나 이해 문제로 빠져 버린 조건이 있을 가능성, 엉뚱한 조건이 추가되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필자가 니까야에서 붓다의 육성을 포집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중시하는 것은, ‘연기적 언어 용법’의 정도와 수준이다.
선정 수행의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읽지 않으면, 선 수행은 흔히 신비능력이나 신비체험을 위한 기법技法으로 간주되어 버린다. 선정 수행을 ‘대상에 대한 마음집중’으로 처리하는 선관禪觀도 그 산물이다. 선 수행이 특별한 기법으로 이해되고 설해지며 전수해 가는 현상은 선 수행의 왜곡이다. 불교 선 수행을 계승하는 현대 명상 수행도 마찬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붓다가 일러준 선 수행의 길을 걸으려면, 기법에 대한 관심은 접어두고 선 수행에 관해 설한 붓다의 연기적 언어부터 신중히 음미해야 한다. ‘선 수행 관련 언어의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먼저 살펴야 한다. 그래야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는다.
니까야가 전하는 사마타·사선四禪·사 념 처 四念處·육 근 수 호 六根守護 법설을 ‘그 법설의 언어가 지시하는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살피면서 음미해 보니, 교학이나 학계의 기존 관점들이 놓치거나 잘못 보았던 대목들이 보였다. 이 책에서 밝힌 선 수행에 관한 소견은 이러한 문제 의식과 방법론에 따른 것이다. ‘발생 조건들을 성찰하는 연기 방법론’에 따라 음미하니, ‘이해수행으로서의 선 수행’과 ‘마음수행으로서의 선 수행’이 대비되었고, ‘마음수행의 길’에서는 〈정념 및 육근수호 법설에서 설하는 알아차림(正知, sampajānāti) →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유식관唯識觀 → 공관空觀을 품은 유식관에 의거한 원효의 일심一心 → 선종의 돈오 견성頓悟見性〉을 관통하는 연속성이 눈에 들어왔다. 붓다가 설한 ‘마음 수행의 길’은, 그렇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원효와의 대화는 그 성과를 기회 있을 때마다 논문이나 저술로 글에 담아왔다. 원효전서의 번역도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선문禪門의 길에 관한 소견은 『돈점 진리담론-지눌과 성철을 중심으로』(세창출판사, 2016)를 비롯하여 간화선 관련 논문 등으로 간헐적으로나마 피력해 왔다. 그러나 〈선 수행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글은 미루어 왔다. 보따리 속을 좀 더 알차게 채우고 난 뒤에 시도하자며 미루어 왔다. 퇴임하여 연구와 집필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해졌지만 계속 미루었다.
계기는 대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가온다. 성철스님 열반 30주년 기념학술대회에서 「퇴옹은 왜 돈오점수를 비판했을까? -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의 차이와 관계」라는 주제를 발표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필자가 선택한 방법론에 따라 생각을 글에 담다 보니 분량이 계속 늘어났다. 할 수 없이 학술대회 발표문과 전체 글을 이원화시켜 『선 수행이란 무엇인가? -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오래 품어 온 보따리를 내려놓으니 묵은 숙제 끝냈다는 후련함이 밀려온다.
원효가 사미 시절 낭지스님에게 배우던
울산 문수산 옆 남암산 끝자락 회향재廻向齋에서
불기 2567년 봄에 붓을 들어 가을에 마치다.